처음 한 권을 접할 때는 몰랐던 것 같다. 이제 세 권 시리즈의 유목제국사의 두 권째까지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심지어 번역서였던 '르네 그루세의 유목 제국사'까지 모두 정재훈 교수님의 자장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은 중국 역사시대의 첫 유목패자였으며, 중국 민족의 ‘자랑스러운 한나라’를 내내 괴롭혔던 최고의 숙적이었던 흉노의 시대가 저물고 난 뒤 두 번째 초원의 패자이자, 유라시아 초원을 하나로 묶고 단일한 영향력 하에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는 '팍스 투르카나(Pax Turkana)'의 모습을 보여줬던 돌궐 유목제국의 흥망성쇠를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자세하고도 집요하게 파고든 책이다. 유목 민족들은 주로 약탈 및 경쟁의 대상이었던 정주 민족들(특히 중국)에 의해 기록되는 입장에 놓였..
지난번에 이어 유튜브 채널 보다(BODA)를 보다 알게 된 또 한 분의 교수님. 서양사를 전공하신 프랑스 유학파. 중세시대 귀족 및 계급사회가 전문인 듯하다. 이미 저작이 꽤 있으신 분이지만 최신작인 귀족시대를 구입하여 읽어보았다. 단 한 군데에서 사학도의 정치혐오가 느껴졌으나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읽기 쉽게 잘 쓴 글이다. 구술도 잘 되고 글도 좋은 흔하지 않은 학자로서 여러 방송에서 앞다투어 섭외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양의 귀족은 그 실체로는 우리가 쉽게 접하진 못하면서도 여러 매체들에서 너무도 친숙하게 접하게 되는 계층인 것 같다. 이 책은 여러 동경과 상상속에서 일견 왜곡되어 있는 중세 유럽의 귀족에 대한 이미지와 실상의 갭을 많이 줄여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흔하게 이야..
충주맨으로 유명해진 충주시 뉴미디어 홍보담당 주무관 김선태 씨의 경험이 담긴, 새로 시작하는 유튜버들을 위한 조언이 담긴 책이다. 저자 특유의 엉뚱함과 유우머로 즐겁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중간중간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나, 조직의 일원이면서 새내기인 유튜버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에 대해 짚어주기를 잃지 않는다.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공감을 불러일으킨 부분은 성공에 대한 저자의 철학이다. "성공은 운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 운이 다다랐을때 내가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라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책을 의무감이나 당위성 또는 어떠한 지식을 얻기위한,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대다수..
요즘 '보다(BODA)' 등의 유튜브 채널에서 자주 만나게 되어 호감이 생긴 성균관대학교 진화생물학과 이대한 교수, 진화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쓴 대중을 위한 분자생물학과 진화유전학의 개설서라고 할 수 있다. 앞부분에 분자생물학 및 진화유전학의 연구방법의 발전과 그 성과를 설명하는 부분이 사용하는 전문적인 어휘들이 낯설어 조금 힘들었지만 (그 부분은 꼭 다 이해하거나 외우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 그 설명을 바탕으로 실제 우리 인류가 어떤 것들을 궁금해서 어떻게 연구를 하고, 어떤 것 (연구성과) 들을 알아내었는지 잘 짜인 흐름을 타고 부드럽게 설명해 주어서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유전적 표현형에 어떤 유전정보의 변이가 어떠한 방식으로 관여하는지 알 수 있게 된 인간은 늘..
이번 도서는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고 인식이 부재해 오해하기 쉽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대신 나서서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사랑하는 가톨릭 교도 역사학자가 쓴 이슬람교와 무슬림 소개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갖기쉬운 편견과 오해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우리의 허상에서 정 반대의 대척점에 서있는 무슬림들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잘못되고 (의도적으로) 왜곡된 이미지들의 실체를 마치 혼나는 아이를 변호하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열심히 나서서 대변하는 느낌이 든다. 각 챕터마다 혹시 이 분 스스로가 이슬람 문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향된 변호를 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끝까지 긴장된 마음으로 글을 읽어나갔다. 일부분은 마음이 앞서 조금은 부적절한 예시가 아닐까 싶은 부분도 있었지..
읽는 내내 가슴이 쓰리다. 그래서 자꾸만 나아가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이렇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성실했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가졌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그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고 비난을 거듭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기적이다. 그 누가 이토록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모든 분야에서 깊게 해 왔을 수가 있을까. 우린 우리 수준에 넘치는 대통령을 가졌었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사람이라야 겨우 다다를 수 있는 곳이겠다. 그래서 그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히 믿어주지도 못했다. 그래서 우린 교과서와 사시공부 이외에는 책 따윈 거들떠도 안보는 것 같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가지게 되었다. 남북, 남북미의 평화를 위한 노력들과 그 순간마다 발목을 잡던 일본의 방해. 일본 정부의..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우리 종(호모 사피엔스)은 다른 종들과의 경쟁에서 거짓말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한다. 민족, 국가, 종교 등 실체가 없는 것들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믿게 만드는 능력이 보다 큰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왔고, 그 공동체의 힘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살아남았다)고 이야기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 에서 우연히 유럽인들이 살았던 지정학적 위치가 보다 타 지역들보다 유리한 환경으로 기술과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로 인한 차이들이 누적되어 전 세계를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조지프 헨릭은 이 책에서 우리 종의 성공과 발전이 집단두뇌의 크기를 키워 많은 문화적 전달목록들을 만들었으며, 이 문화적 전달목록들이 인류에게 ..
낯익은 플롯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정작 그를 잘 몰랐던 딸이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간다. 더 낯익은 내용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 아버지와 얽혀있는 사람들의 행태가. 내가 어제도 오늘도 보고 겪어온 바로 곁의 한 사람 두 사람의 그것이라 너무나도 낯이 익다. 그래서 징글징글하다. 그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생겨난 결과인지 너무나도 잘 알겠어서 소름이 끼친다. 이것이 한국 문학이다. 내가 나고 살아가는 곳에 함께 얽혀있는 흙먼지 처럼 뒤엉켜 있고 눌어붙어 떼어내려 해도 잘 떨어지지 않는 생채기 같다. 이곳에 진짜 한국말이 살아있다. 세월과 한을 ..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 이 단어는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에는 없었던 말이라고 한다. 다윈이 선택한 Natural Selection이라는 용어가 자연이라는 배경을 무언가를 선택 가능한 주체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어 동료 과학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차용한 용어이다. 이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는 ‘이기적 유전자’처럼 진화와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마치 진화는 곧 진보이며, 진화하지 못한 개체는 보다 열등하고 미천하여 멸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미지로 소비되었고, 우생학이라는 괴물까지 만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수많은 다른 동식물은 물론 같은 인간마저 등급을 나누고 살해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만들기까지 하는 끔찍한 결과를 자아냈다. 이 책에선 개와 여우의 ..
슬램덩크가 한국에서 연재되던 시절은 1992년부터였다. 1991년 2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소년 점프의 연재작이었던 슬램덩크는 1992년 국내 신생잡지인 대원(현 대원씨아이)의 소년 챔프에 몇 페이지씩 잘라서 연재되기 시작했다. 1991년 막 창간했던 소년챔프는 경쟁사인 서울문화사(현 서울미디어코믹스)의 아이큐점프와 국내 첫 정식 계약해 가져온 작품인 드래곤볼에 꽤나 고전하고 있던 터라 편집부에서 전략적으로 같은 잡지 소년 점프의 연재작이었던 슬램덩크와 판권 계약을 한 것이다. 1989년 창간된 국내 만화잡지 아이큐점프의 간판작품이던 드래곤볼은 매 호 10만 부 정도가 팔렸던 아이큐 점프의 판매량을 5배 이상으로 끌어올린 초 히트작으로 그전까지 해적판으로 소개되던 것을 국내 최초로 일본 만화와 정식 판권계..
'작가가 독자를 기만한 작품'이라고 하면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연재를 아예 놓은 작품? 연재는 하고 있지만 사실상 끝날 기미가 없는 작품 혹은 끝내지도 못한 채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에서 작가가 급서한 작품? 여러 작품이 많겠지만 현시대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을 딱 하나만 적자면 다중인격탐정 사이코(多重人格探偵サイコ)를 꼽고 싶습니다. 나나? 일단 작가분은 살아있잖아요. 파이브 스타 스토리? 그래도 나가노 마모루는 돈 떨어지면 열심히 그릴 겁니다. 구인 사가? 원작가 구리모토 카오루는 서거하기 전까지 작품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최소한 사이코와 비교될 정도의 작품은 아닙니다. 이제는 초반의 센세이션도 끝나버리고 추할 대로 추하게 끝나버린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이제는 너무 오래된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단순무식한 불량배 '무대포' 역할로 나온 유오성 씨가 유행시킨 대사가 있다. "난 한놈만 패."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대사가 '난 한놈만 패' 였다. 그렉 이건(Greg Egan)의 '쿼런틴(Quarantine)'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양계에 벌어진 '격리' 현상이 불러온 파장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인류가 스스로의 뇌 속의 감정과 사고들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그 효과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미래사회에서 벌어진 미스터리 한 사건을 다룬 SF소설이다. 원래는 1992년에 출판된 오래된 소설이었으며 국내에서는 SF 번역 출간으로 유명한 행복한책읽기에서 정발 되었다. 그 이후 장기간 절판 되어 있다가 2022년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