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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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9번은 누가 뭐래도 팀의 주 득점을 맡는 최전방 공격수다. 오죽하면 전술에도 최전방 공격수를 쓰지 않는다는 의미인 폴스 나인 (False 9)이란 용어를 쓰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스트라이커에는 18번을 단 황선홍이나 10번을 달았던 최용수, 박주영의 시대가 길었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공격수 중에 9번을 단 공격수는 한번에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총 10번의 월드컵 중 9번을 단 선수의 골은 5 득점을 기록했다. 과연 우리나라 대표팀의 9번을 단 선수는 누구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상권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

 

이북 출신이었지만 광복을 맞이해 서울로 내려와 서울 한양중, 한양공고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 바로 군에 입대한 뒤 5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다. 상당한 단신으로 인해 악착같은 연습으로 통해 기술과 체력을 끌어올렸다는 인터뷰를 했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비롯해 이어진 1, 2회 아시안컵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국가대표 포워드로 활약했다. 하지만 도쿄 올림픽에서 당시 아랍공화국에서 0대10으로 참패를 당하면서 34세의 나이로 은퇴해 코치를 역임했으며 자신의 모교인 한양공고 코치를 맡기도 했다. 그러던 1975년 12월 13일 구의동에 위치한 본인의 자택에서 췌장암으로 인해 향년 43세에 숨을 거두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최순호 (포항 아톰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천재 공격수 중 한 명인 최순호가 멕시코 월드컵에서 9번을 달았다. 이미 월드컵 전부터 최순호의 실력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1981년 U-20 대회에서 이탈리아를 맞아 2골 2도움으로 4대1로 이기는데 기여하기도했고, 앞서 열린 1980년 아시안컵에서 18세의 나이로 7골을 기록하며 최연소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1차전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만나 5-3-2 전술에 차범근과 투 톱을 이룬 최순호였지만 그 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르헨티나는 너무나도 강했다. 결국 김정남 감독은 2차전 불가리아 전에서 최순호를 빼고 변병주와 차범근을 투톱을 세웠으며 결국 교체해 들어간 김종부가 득점을 기록해 첫 승점을 획득했다. 그리고 대망의 지난 대회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를 맞아 대한민국 역시 질 수 없다는 포메이션으로 들어갔다. 기존의 수비 위주의 5-3-2가 아닌 3-4-3의 공격형 전술을 내세우며 최순호, 변병주, 차범근을 모두 공격진에 투입시킨 것이었다. 최순호는 후반 17분 1대1의 상황으로 만드는 멋진 동점골을 넣었다. 수비수를 측면에서 빗겨가며 강렬하게 넣었던 그 골은 아직도 월드컵 역대 멋진 골 순위에 안에 들어가는 환상적인 골이었다. 하지만 결국 처절한 도전끝에도 축구의 신은 한국에게 승점을 주지 않았다. 결과는 2대3의 석패였다.

 

이미 청소년때부터 최순호를 눈여겨 보던 이탈리아의 명문 구단 유벤투스는 구단의 스카우트를 비롯한 구단 수뇌진까지 나서서 최순호를 잡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최순호의 국제대회 경기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병역법으로 유벤투스에 진출하지 못했다. 당시 병역법은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으면 국내에서 5년간 해당분야에 종사해야 했으며 1~2년이 다른 운동선수에게 5년의 기다림은 사실상 포기나 다름없었다. 다른 실례로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 선수 역시 같은 이유로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사인까지 했음에도 MLB에 진출못하기도 했다. 당시 유벤투스 행을 간절히 원해 거액의 일본 실업 리그에서의 영입도 거부했던 최순호는 결국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황보관 (유공 코끼리)

 

 

FC서울 팬들에게는 그의 어떤 사진도 혐짤이 되고, 대한축구협회의 적폐세력의 주축이라고도 하며, 아직도 성이 '황보'가 아닌 '황'씨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 '캐논슈터' 황보관.

 

황보관은 1988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며 좋은 실력으로 신인상을 수상해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팀에도 엔트리에 발탁된다. 하지만 그가 출전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결과만 놓고 보자면 우리나라 월드컵 사상 가장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전 전패 그리고 딱 1득점, 뒤에 그렇게 욕을 먹는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승점을 1점은 따냈고, 득점도 3개나 기록했다. 그 딱 1 득점이 바로 황보관의 캐논 슈팅이었다. 예선 2차전 스페인전 전반 43분 프리킥 기회에서 최순호가 살짝 굴려준 볼을 그대로 차 114km/h의 슈팅을 날렸다.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골키퍼인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꼼짝도 못하던 슛이었다. 경기는 비록 1대3으로 패배했지만 그래도 그 골이 이탈리아 월드컵 베스트 골 5에 선정된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김주성 (VfL 보훔)

 

 

폭발적인 스피드와 개인기, 그리고 양발을 다룰 수 있었던 김주성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스트라이커의 계보다. 하지만 앞선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뛰었는지도 모를만큼 부진했고 결국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도하의 기적을 넘어선 자신의 3번째 월드컵이 다가왔다. 어느새 김주성은 주장 최인영과 함께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그리고 김주성은 3가지가 바뀌었다.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16번에서 9번으로,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긴 갈기머리가 단정하게 잘려있었다.

 

대표팀의 쓰리톱인 황선홍, 고정운, 서정원, 조진호가 끝없이 로테이션으로 돌아갔음에도 김주성은 3경기를 모두 뛰었다. 스페인전에서 황선홍과의 투톱은 어색했으나, 볼리비아전에서 미드필더로 내려와서의 날카로운 침투 패스와, 독일전 초반의 에펜베르크를 괴롭히는 공격력으로 괜찮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프로에 돌아와서는 인대가 크게 다쳤음을 깨닫고 수비수로 변환해 포메이션 변경에 성공했으며, 유상철과 함께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BEST 11에 든 선수 중 하나가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김도훈 (비셀 고베)

 

 

큰 키와 피지컬을 통한 포스트플레이가 훌륭했으며 핀 포인트 퍼스트터치나 바이시클 킥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김도훈이 98년 대표팀의 9번이었다. 특히 1994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바이시클 킥 골로 대중들의 이목을 한번에 집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원톱을 중시하는 5-4-1 시스템의 한국에서 황선홍과 최용수에 밀려 김도훈은 큰 기회를 얻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월드컵 전 황선홍의 시즌 아웃급 부상과 최용수가 컨디션 난조를 보이면서 차범근 감독은 김도훈을 멕시코 전에 선발 출전시켰다. 하지만 김도훈 역시 컨디션이 썩 좋지 않으면서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후반전엔 다리에 쥐까지 나면서 침을 맞아가며 뛰기도 했다. 당시 하석주의 퇴장도 있었지만 지고 있는 와중에도 아시아 예선전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최용수 대신 김도훈이 나타나자 축구팬들의 성토가 이어지기도 했다. 2차전인 네덜란드전도 선발 출전해 초반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옆그물을 맞추며 해설진조차 골로 착각했을만큼 좋은 슈팅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 후로 결과는 모두가 알 것이다.

 

김도훈은 K리그의 자신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실력이 나쁘지 않은 선수였다. 하지만 국가대표의 자리에는 황선홍과 최용수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이 떠나자 이동국이 그 뒤를 이었다. 그 후 히딩크 체제가 시작되면서 타겟형 스트라이커보다는 이천수, 차두리, 박지성 같은 윙포워드를 살리는 연계성 포워드를 원했고 결국 엔트리에 탈락하게 되면서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보였음에도 뛰어난 공격수가 동시대에 너무 많아 대표팀에서 활약을 하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로이 마카이와 비교하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잉글랜드 공격수 앨런 시어러(Alan Shearer)와 유사한 스타일이었을 뿐 아니라, 같은 70년생, 같은 183cm의 키, 98년 마지막 월드컵, 리그에서의 독자적인 기록, A매치 통산 30골이 모두 똑같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설기현 (RSC 안더레흐트)

 

 

설기현은 강릉 제일고와 광운대를 거쳐 청소년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한국 대표팀의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당시 축구협회의 유망주 육성 계획에 따라 K리그가 아닌 벨기에 주필러 리그의 로얄 앤트워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첫 시즌 리그 10골을 넣으며 차범근 이후 유럽리그 첫 두자리 골을 기록했고, 이후 RSC 안더레흐트로 이적해 한국인 첫 챔피언스리그 골도 기록했다.

 

그리고 찾아온 2002년 월드컵, 거스 히딩크는 당연히 발탁될 것이라 믿었던 이동국을 과감히 제외시키고 대체 자원으로 윙 포워드를 전담할 수 있는 설기현을 발탁했다. 배번 역시 스트라이커에게 주는 9번을 받았다. 하지만 2승1무의 최고의 조별성적에도 유일하게 욕을 들어먹었던 선수가 바로 설기현이었다. 폴란드, 미국 전에서 수 차례에 걸친 득점 기회를 모두 무산시켰다. 하지만 히딩크의 믿음은 굳건했다. 끝 없이 설기현을 기용했고 그 믿음은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후반 막판 천금같은 동점골로 보답하는데 성공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안정환 (MSV 뒤스부르크)

 

 

 

2002년 미국, 이탈리아 전에서 두 골을 기록한 안정환은 그야말로 반지의 '제왕'이었다. 당시 안정환의 실력은 극강에 달했다. 굳이 득점이 아니라도 큰 경기의 결정적인 상황에는 늘 안정환의 터치가 들어가 있었다. 히딩크 체제가 끝나고 코엘류 감독 당시 경기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지독한 골 가뭄에 시달려 사상 초유의 군사 훈련병이 국가대표에 들어갈만큼 안정환의 위엄은 대단했다.

 

하지만 실력이 비해 지독히 구단 운이 없었던 안정환이었다. 골든골 이후 폭도로 인해 페루지아에서 쫓겨나다시피 나가고 소송에서 패소하며 빚이 생기자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한 일본의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한다. 그때 블랙번 로버스와의 계약 체결 실패를 아직도 아쉬워하고 있다고 은퇴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시미즈 S펄스에 이어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고 그 후로 다시금 유럽진출을 위해 FC 메츠에 들어가게 되지만 최악의 팀 분위기로 이렇다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때 수석코치였던 핌 베어벡은 독일에서 현지적응이 가능하다면 대표팀에 뽑아주겠다는 말을 했고 분데스리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이적하고 싶지 않았던 안정환이었지만 굉장히 강한 애국심으로 결국 독일의 뒤스부르그로 입단한다.

 

그리고 나선 2006년 독일 월드컵 1차전 토고전에서 체력이 떨어졌다는 세간의 여론을 뒤로 하고 후반 26분 역전 중거리슛을 기록했고, 2차전 프랑스전 역시 후반 교체로 나오자마자 대표팀의 '기어'가 변환되는 느낌이었다. 앞선 설기현의 돌파 전 안정환의 기가 막힌 원터치 윙패스가 골로 이어진 셈이었다. 아드보카트 감독도 이 점을 알고 스위스전에 안정환을 선발로 출전시키려 했으나 결국 아쉽게도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안정환 (다롄 스더)

 

 

안정환은 그 후로 유럽행을 포기하고 가족들을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부산 아이파크를 거쳐 2009시즌 중국 다롄 스더로 이적했다. 당시 2009년 단기 계약임에도 6골 2도움의 활약을 보였고, 그로 인해 1년 더 계약해 10골 4도움을 기록하며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당시 별명이 다롄의 왕 (大連的王)이었으며, 안정환이 태클로 부상을 입자 그 후로 리그 6위까지 다롄 스더가 떨어진 것은 얼마나 그의 능력이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후 허정무 감독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최종 명단에 안정환을 발탁했지만, 허정무 감독의 의중은 즉시 전력감으로 안정환을 발탁했다기보다 당시 2002, 2006년 주축이 되었던 세대들이 한번에 빠지고 대표팀이 너무 어려지자 이운재와 더불어 후배의 튜터링을 해주라는 목적으로 발탁되었다. 결국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벤치에서 원정 첫 16강을 이끌었으며, 개인적으로 2014년 월드컵때 박지성 선수가 이런 역할을 해주길 바랬으나 역시나 그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국 아쉽게 되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손흥민 (바이어 레버쿠젠)

 

 

박주영 이후 차세대 공격수가 나오지 않을까 하던 무렵, EPL만 관심을 가지던 당시 한국 축구팬들의 눈에 분데스리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북고를 3개월 정도 다니다 중퇴하고 독일 함부르크 SV 유스팀에서 유학을 간 손흥민이었다. 2009년 U-17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이자 함부르크 SV는 즉시 엄청난 재능이라며 스카우트를 해 영입을 했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함부르크에서의 활약으로 다양한 빅클럽과 꾸준히 링크가 돌던 손흥민은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전을 앞두고 레버쿠젠으로의 공식 이적을 확정지었다. 당시 레버쿠젠 팬들은 당연히 70~80년대 활약한 차범근을 떠올리며 기대에 부풀었다.

 

대표팀에서도 야심차게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손흥민은 당시 3승을 할 수 있을거라는 기대에 머리마저 노랗게 염색을 하고 나왔다. 하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손흥민은 지금보다 더 투박했고, 연계가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뛰어나지 않았던 팀과도 연계가 떨어졌고 결국 자신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침투능력과 양발을 모두 사용할 폭발적인 슈팅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가 한번도 달지 않았던 번호인 9번처럼 대표팀에서 손흥민의 자리는 어색했다. 알제리 전에서 자신의 월드컵 첫 골을 터트렸지만, 아쉽게도 울음도 함께 터트렸던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 김신욱이냐? 석현준이냐? "

 

월드컵 마지막까지도 이 질문의 해답은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3백을 가동하지 않았을 신태용 호에서 수비수 한 명을 제외하고 "나는 둘 다" 를 선택했던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월드컵에서 박주영 대신에 나와 큰 키를 이용한 패싱으로 꽤 주목을 받았던 김신욱이었고 특히 EAFF E-1 챔피언십에서 3경기에 모두 출장해 중국전에서 1골 1어시스트, 일본전 2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해 석현준, 황희찬보다 우위를 점했다.

 

그렇게 큰 키를 이용한 플레이가 같은 피지컬의 유럽선수들에게 유효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딱 아시아용이었다는 말이 크다. 몰도바, 라트비아전에서는 연속 헤딩 골을 보여주었지만, 하지만 연이은 북아일랜드, 보스니아, 볼리비아 전때 김신욱의 피지컬은 소위 '버로우'를 탔다. 심지어 비공개 세네갈전에서 자책골을 넣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김신욱이 출전하면 사실상 기권용 수건을 던지는 것과 같다며 '수건욱'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결국 출전한 1차전 스웨덴전에서 포스트 플레이에 대한 이해도의 부족으로 팀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스웨덴의 베리 역시 득점 상황은 못 만들었지만 수비수 김영권과 장현수의 압박으로 미드필더에 좋지 않은 패스를 갖게끔 만들기라도 한데 반해, 김신욱은 그야말로 그라우드에 덩그라니 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김신욱을 톱으로 두면서 재미를 본 감독은 발생하지 못했으며, 다음 감독 체제하에서도 김신욱의 활용도는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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