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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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은 누가 뭐래도 팀에서 믿음직한 미드필더다. 화려한 10번 형 미드필더 옆에서 때로는 묵묵히 수비 백업을 봐주기도 하고 때로는 칼날같은 패스로 공수 양면에서 활발히 조율을 해주기도 한다. 최근 10여년간 김두현, 김정우 같은 선수들이 대표팀의 8번을 달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러시아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세종 선수가 8번을 달았다는걸 기억하더라도 대표팀에서 8번의 자리가 어떤 위치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등번호 8번에 대한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넘어가보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최정민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가끔 대한민국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계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회택으로 시작되어, 차범근, 최순호, 황선홍, 최용수 등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계보들을 말이다. 그 최초의 인물이 바로 '아시아의 황금발' 최정민이다. 최정민은 본래 평양 사람이며 경평전에서 평양 대표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1.4 후퇴 후 남하해 김용식 감독의 발탁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10여년간 활동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 이 경기를 불허할 작정이었다. 일본이 패전국이라 할지라도 오래전부터 근대 스포츠를 하고 있던 터라 일본팀이 강세에 있었으며, 심지어 대한민국 대표팀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신인선수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 홈 경기에서 일본팀에게 패배라도 한다면 국민의 사기가 엄청나게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유형 감독은 원정만으로 경기를 치뤄도 상관없으며 패배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며 간청했고 결국 경기 승낙이 떨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어웨이로만 이루어진 한일전 2차전에서 최정민은 3골을 넣으며 1승 1무로 스위스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낸다. 당시로서는 178cm의 큰 키에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로 특히 한일전에서만 통산 7골을 넣었을 정도로 한일전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영증 (럭키금성 황소)

 

 

조영증은 공수에서 모두 뛰어난 선수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멀티 플레이어'의 원조인 셈이다. 선수시절 실업팀 제일은행에서 뛰다가 북미 축구 리그로 넘어가 포틀랜트 팀버스와 시카고 스팅에서 뛰었다. 이러한 커리어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피지컬를 중심으로 전술 이해도 마저 뛰어나 '수비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전방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해 1985년 태국 용병 피아퐁을 영입하기전까지 럭키금성에서 공격수로도 훌륭한 활약을 했다. 1995년 황선홍이 8경기 연속골 기록을 깨기전 6경기 연속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포백으로 나선 아르헨티나 전을 제외하고 불가리아, 이탈리아 전에서 앞서 설명한 박경훈, 정용환과 3백을 이루며 멕시코 월드컵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정해원 (대우 로얄즈)

 

 

1983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해 1991년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 뛴 대우 로얄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정해원. 그는 특히 멀티골에 명수였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이라던지 1980년 아시안컵 북한과의 4강전에서 막판 두 골을 몰아치며 역전승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특히 탁월했다. A매치 58경기 21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정해원의 출장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스페인전에 첫 월드컵 출장을 했지만 후반 7분에 미드필더 노수진과 교체되었고, 우루과이 전에서는 후반 10분 가량을 남겨두고 공격수 황보관을 대신해 출전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노정윤 (히로시마 산프레체)

 

 

노정윤은 윤정환 이전 대한민국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다. 당시 독일의 마테우스의 플레이와 비슷하다고 해서 '노테우스'라는 별명도 있을 정도였다. 빠른 발과 강한 몸싸움으로 미드필더 진영을 시종일관 뛰어다니면서 게임을 운영하는 스타일이었다. 현대축구에서는 상당히 뛰어날 재능이었지만 아쉽게도 당시에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들은 그의 플레이를 체력 소모가 심한 비효율적인 플레이라고 평을 내리기도 했다. 실제로도 후반 경기 중에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월드컵 대표팀 감독만은 노정윤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부평고-고려대의 로열을 지난 노정윤의 종착지는 드래프트로 인해 약체 신생팀 완산 푸마로 이적해야 했다. 그는 선배 정재권과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그는 히로시마 산프레체에서 특유의 근성으로 첫 시즌부터 주전을 꿰찼다. 이에 김호 감독은 김주성과 함께 팀을 이끌 주축 선수로 노정윤을 점찍었다. 부진했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훌륭한 플레이로 본선행을 이끌어냈고 스페인과 볼리비아전에서 선발로 뛰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노정윤 (NAC 브레다)

 

 

J리그에서 뛰어난 활약과 미국 월드컵에서의 모습이 돋보였지만 1997년 노정윤의 팀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퇴단을 결정하고 새로운 기회를 유럽에서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는 네덜란드 NAC 브레다로 이적에 성공하면서 허정무에 이어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한 두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당시 데뷔전부터 골을 터트리며 활약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로 노정윤은 국가대표와 큰 연이 없었다. 앞서 설명한 윤정환이 확실히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 체계로 바뀌면서 좀 더 많은 활동량을 선보일 선수가 필요했다. 결국 다시금 차범근 감독은 노정윤을 대표팀에 발탁했고, 슬로바키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다시금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노정윤의 기회는 많이 없었다. 멕시코 전에서 선발 출전했지만 하석주의 퇴장으로 후반 10분에 수비수 장형석과 교체되어야 했고, 네덜란드, 벨기에 전에서는 같은 자리의 김도근, 고종수에 밀려서 출장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월드컵에서 입고 온 부상으로 인해 결국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고 다시금 J리그로 입단해 세레소 오사카에 들어가게 된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최태욱 (안양 LG 치타스)

 

 

부평고 3인방 이천수, 최태욱, 박용호는 고교시절 전국랭킹 탑이었다. 여기에서도 단연 1위는 최태욱이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밀렸던 이천수가 최태욱을 뛰어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당시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엔트리에 이천수, 박지성과 함께 최태욱은 4년을 월반해 팀에 들어가게 된다.

 

재밌는 사실은 단정한 외모와 독실한 크리스천, 성실한 플레이가 돋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최태욱에게 축구는 직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까지 그렇게 뛰어난 피지컬만으로 축구를 하던 도중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는 이야기에 영광스러운 월드컵에 출장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게 된다. 그 국가대표에 대한 열망 하나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2001년 11월 상암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상암 경기장 1호골의 주인공이 된다.

 

히딩크는 스피드와 성실함에 결국 최종 엔트리 23인 명단에 들었고, 같은 포지션의 이천수나 차두리보다 앞선 8번을 배정받게 된다. 그리고는 마지막 최종 평가전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평가전에서도 선발 출전을 하면서 월드컵의 꿈이 보이는듯 했으나 마지막에 부상을 당하게 되며 대회 초반에 결장을 하게 된다. 이때 라이벌이었던 이천수와 차두리가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결국 경쟁에서 밀리면서 마지막 터키와의 3~4위전에서 후반 설기현과 교체되어 10분만을 뛰게 된다. 그 10분 동안 그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경기를 펼치게 되며 결국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최태욱은 필드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끼는 모습이 방송에 잡히기도 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김두현 (성남 일화 천마)

 

 

김두현은 미드필더진의 공을 공격수들에게 잘 배급해주면서도 좋은 활동량을 가졌고, 뿐만 아니라 킥력이 뛰어나 세트플레이 상황에서의 킥이나 중거리슈터로써도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삼성으로 입단해 고종수의 뒤를 이을 유망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2002년 고종수의 장기 부상과 외인 용병들의 부진으로 2003년 34경기에 출장하며 주전선수로서의 도약을 한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 체제에서 자신의 장기였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뺏기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성남 일화로 이적하며 김학범 체제의 공격의 축이 된다.

 

하지만 국가대표에서 김두현의 평은 애매하다. 앞선 플레이 스타일때문에 제라드, 람파드와 비교되는 별명을 K리그에서는 붙여주었지만 A매치만 나오면 중거리슛 이외에 활약이 부진했다. 이때 소위 '국내용 vs 국대용' 이라는 논란의 시작이 되기도 한 선수다. 하지만 코엘류 감독을 사퇴하게 한 몰디브 원정경기 0대0 무승부로 한국은 아시아 최종예선마저도 못 갈 위기에 처해졌을때 홈경기에서 김두현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힘겹게 2대0 승리를 이끌어냈다.

 

또한 불운마저 합쳐져 월드컵에서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너무나 강력한 선수들이 있었다. 4-2-3-1 포메이션을 세워 반격을 나설때에는 공격력을 배가 시키기 위해 안정환이 들어갔고, 4-3-3으로 중앙에 집중해야할때 그 자리에는 박지성이 들어왔다. 결국 아쉽게도 김두현이 월드컵 본선에서 설 자리는 부족했고 그렇게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자신의 월드컵은 아쉽게 끝났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김정우 (광주 상무)

 

 

김정우는 184cm의 비교적 큰 키였지만 74kg의 매우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주로 별명에 "뼈", "골(骨)"이 들어가기도 했을만큼 말이다. 하지만 포지션은 가장 치열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역시 앞선 부평고-고려대 라인을 거쳐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 당시 왜소해보이는 체격이었지만 몸싸움이 상당히 터프했고 미드필더에서의 시야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패스 길목 차단 능력과 커팅 능력, 그리고 중거리 슈팅과 공격형 미드필더 출신다운 볼간수 능력까지 탁월한 선수였다. 중원의 박지성을 보조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였다. 지난 2006년 월드컵에서 김남일, 이호, 백지훈에게 밀려 결국 최종 엔트리에 탈락하자 김정우는 절치부심을 해 핌 베어벡 체제에서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는 허정무 체제로 바뀌자 박지성 다음의 대한민국 미드필더 랭킹 순위는 김정우가 되었다. 당시 폼이 떨어진 김남일보다 터프했으며, 당시 유망주였던 구자철, 기성용은 김정우의 보조로 보일 정도였다. 2010년 '양박쌍용' 체제라고 하지만 당시 빌드업이 부족한 기성용이 수비에서 패스를 뿌려주기 이해 내려가면 기존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메워주었고, 기성용이 앞서 이청용, 박지성, 박주영에게 패스를 뿌려주기 위해 나가면 백업으로 후방 미드필더를 메워주는 플레이를 보였다. 사실상 2010년 16강을 이끈 양박쌍용을 한 팀으로 묶어준 플레이를 한게 김정우였던 셈이다.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도 덴마크, 스페인을 비롯 본선의 아르헨티나 등의 미드필더와의 대결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2010년 동아시안컵 일본전에서 김정우가 퇴장당하자마자 줄곧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최고 단점은 빠른 하향세였다. 2010년에 절정을 찍은 김정우였지만 2012년 전북 이적 이후부터 급격히 하향세를 그렸다. 만약 이 폼 그대로 2014년에 기성용과 짝을 맞추어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또 상황은 알 수 없어졌을 것이다.

 


 

2014년 남아공 월드컵

 

하대성 (베이징 궈안)

 

 

2010년 최종 5위에 그친 FC서울은 전북에게 심우연, 김승용을 주고 하대성과 이현승을 받아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그때부터 하대성은 중원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내며 '상암 중원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중반 최용수 감독 체제에서도 하대성은 잔부상 속에서도 서울의 6강 진출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당시 무시무시한 데몰리션(데얀+몰리나) 콤비에게 찔러주는 킬패스와 오프라인 움직임은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자리잡게 했다. 당연하게 국가대표에서도 여러 차례 소집되었지만 크게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 체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연착하는 기대를 하게 했다. 특히나 기성용의 안이한 발언으로 중원이 비게 되자 이명주와 함께 대표팀의 중원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파들이 다시금 국가대표에 나오자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백업 요원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들게 되지만 부상을 입게 되면서 결국 출장을 하진 못하게 되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주세종 (아산 무궁화)

 

 

주세종은 부산 아이파크 2군에서 데뷔를 시작했으나 대학시절부터 뛰어난 킥력으로 세트피스 키커를 전담하면서 점차 1군의 주전자리로 오르게 되었다. 부산 아이파크의 승강 플레이오프 당시 크로스 능력이 우수했음에도 공격진들이 모두 놓치는 아쉬움을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탈락한 부산 아이파크는 2부리그로 내려가고 주세종은 김현성과 맞트레이드되어 FC 서울로 이적한다. 그리고 FC 서울에서 주세종은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며 서울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종종 슈틸리케 호에서 중용되다 신태용 감독의 국내 마무리 평가전 중 온두라스 전에 출전해 컷팅과 패스 능력을 선보이며 23인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상무 축구단 소속이야 대표팀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주세종으로 인해 경찰 신분 소속의 경찰청 출신의 1호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도 했다. 멕시코 전에 선발 출전하며 월드컵 본선 데뷔전을 치른 주세종은 크게 멕시코 선수들에게 밀리는 것 없이 자신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훌륭히 해냈다. 그로 인해 독일전에서도 체력이 방전된 문선민을 대신해 후반 24분에 교체 출전했고 결국 너무 전방으로 나선 노이어 골키퍼의 공을 빼앗아 롱패스를 전방으로 차내며 손흥민의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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