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6번

반응형
반응형

 

 등번호 6번은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가 다는 경우가 많다. 94년의 재간꾼 이영진이 그랬고, 2014년 김보경이 그랬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유상철하면 6번이 먼저 떠오른다. 그에 비해 4번과 어우러지는 두명의 수비수에서 6번을 다는 경우도 종종있었다. 2006년 최진철과 짝을 맞춘 김진규가 그랬고 2014년 황석호가 그랬다. 그리고 이번 러시아 월드컵의 6번은 박주호다. 공교롭게도 미드필더와 측면 수비수를 모두 설 수 있는 선수다. 이번 시간에 6번을 단 태극전사는 누가 있는지 함께 알아보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민병대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1918년 2월 20일생 배재중학교 시절만 해도 의학도와 축구 선수의 길을 놓고 갈등할 정도로 다재다능했던 민병대는 결국 축구선수의 길을 선택한다. 광복 후 대표팀 감독 김용식 씨와 더불어 조선전업 축구단을 창단했으며 노익장을 과시하며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에도 출장한다. 월드컵 이후 같은해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차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태호 (대우 로얄즈)

 

 

김은중, 곽태휘, 곽희주의 공통점은 한쪽 눈이 실명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축구선수 생활을 지속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들의 앞에는 바로 이태호가 있었다.

 

1979년 U-20 월드컵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첫 골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태호는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과의 어웨이 경기에서 전반전 역습찬스에 최순호의 크로스패스를 받아 수비수 2명과 골키퍼까지 제치며 결승골을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본선대회에서는 차범근, 최순호, 변병주라는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태호 (대우 로얄즈)

 

 

앞서 실명 이야기를 했지만, 실은 그가 눈을 다친 것은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1987년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발에 눈을 강타당하면서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좁은시야를 극복해 나가며 계속 실력을 키워왔고 결국 이회택 감독에서도 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앞선 선배들에 의해 본선 경기를 뛰지 못한데 반해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후배 황선홍과 김주성에 밀려 1차전 벨기에 전에서만 후반 17분 미드필더 노수진과 교체되어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다. 하지만 이태호는 양 발과 헤딩은 물론 배, 허벅지 등 온 몸으로 골을 넣을 줄 아는 감각과 한쪽 눈이 실명인데도 불구하고 뛰어난 위치선정을 가져 차범근이 이태호를 '한국의 게르트 뮐러'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이영진 (LG 치타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4강 신화를 이뤘을때 함께 환호했던 수석코치의 얼굴이 낮이 익었다. 바로 이번에 소개할 이영진이다. 169cm의 크지 않은 체구의 이영진은 별명인 '악바리' 답게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며 그라운드를 뛰어다녔고 부족한 피지컬을 판단력으로 압도하며 자신보다 큰 미드필더들을 장악하는게 특기였다. 그런 빠른 움직임과 판단력으로 이어지는 송곳 같은 패스가 이영진의 최고 장점이었다. 근성을 요구하는 김호 감독에게 이영진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였다.

 

본선에서 이영진은 스페인, 볼리비아전에서 풀타임 출장을 했다. 스페인 전에서 이영진의 중거리슛에서 부터 좋은 흐름을 가져와 호평을 받았으나, 볼리비아전에서 맥없는 공격의 일원이 되면서 질타를 받기도 했다. 마지막 3차전 독일전에서는 3골을 연달아 실점하자 미드필더진의 쇄신을 위해 전반 40분에 정종선 선수와 교체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유상철 (울산 현대 호랑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0:1로 뒤지는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국민들에게 유상철이라는 이름을 각인 시켰다. 하지만 유상철이 뛰어난 선수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선수들이 그러했듯이 볼 터치나 드리블 능력같은 기술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어떤 선수와도 밀리지 않는 하드웨어와 위치선정, 넓은 시야가 그를 한국 축구의 중심에 있게 했다. 네덜란드전 대패의 이유로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면서 최악의 상황이 된 마지막 벨기에 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눈물을 자아낼만큼 투혼을 보였다. 하지만 골은 미치도록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왼쪽 측에서 김태영이 파울을 얻어냈고, 1차전에서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하석주가 프리킥을 찼다. 그리고 유상철의 탁월한 위치 선정에 이은 슬라이딩 슛이 벨기에의 골문을 출렁이게 했다. 2연속 패배로 절망에 빠졌던 대한민국 국민들을 그나마 위안시켜줄 투혼의 동점골이었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유상철 (가시와 레이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임 이후 한국 축구는 큰 반전을 겪는다. 늘 투혼에 비해서 기술이 좋지 않다고 여겼던 당시의 여론을 뒤집고, 기술은 수준급이지만 체력과 정신력이 엉망이라는 평가를 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포지션뿐 아니라 히딩크식 전술을 위해서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렇다면 최고의 피지컬, 수비수부터 득점왕까지 가능한 공격수까지 모두 가능한 유상철은 히딩크 호의 초 핵심 멤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럽의 힘에 맞선 유상철의 파워는 그대로 적중했다.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해 대회 BEST 11에 선발되기도 한 유상철은 첫 경기 폴란드 전에서 쐐기의 중거리포까지 쏘아올리며 대한민국의 4강 신화의 1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영국의 축구 평론가 앤드류 워쇼는 유럽축구연맹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최고이며 침착성과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평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 번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김진규 (쥬빌로 이와타)

 

 

청소년대표부터 차근차근 수비의 핵심으로 성장한 김진규는 조 본프레레 감독 부임초기부터 은퇴를 앞둔 같은 전남 드래곤즈 선배이기도 한 김태영의 후계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김진규의 맨마킹 능력 부족으로 결정적인 실점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하지만 2005년부터 박재홍, 박동혁과 함께 3백의 한 축으로 꾸준히 대표팀에서 눈도장을 찍었고 특히나 특유의 강력한 프리킥으로 이목을 받기도 했다.

 

결국 후임 딕 아드보카트 감독 선임 이후에도 대표팀에서 수비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고 2006년 월드컵에서 선배 최진철과 함께 활약하면서 부동의 국가대표 주전 센터백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계속되는 부상으로 폼이 하락했다. 후에 허정무 감독 부임 이후 곽태휘와 조용형이 부상할 경우에 후보 선수로 나가긴 했지만 2012년 8월 마지막 태극마크를 달고 A매치 42경기의 끝을 맺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김보경 (오이타 트리니타)

 

 

K리그의 고질적인 드래프트 제도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가지못할 것을 알고 김보경은 바로 J리그로 발길을 돌린다.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한 김보경은 외국인 쿼터제로 인해 오이타 트리니타로 1년간 임대를 가게되는데 이때 출전하자마자 골을 터트리더니 5경기 동안 6골을 넣는 쾌조의 출발을 보인다. 이에 허정무 감독은 남아공 월드컵에 김보경을 발탁하는데, 재밌는 점은 오이타 트리니타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대표가 된다.

 

당시 허정무 감독이 밀던 영건들은 김보경을 비롯한 김신욱, 구자철, 이승렬이었다. 이 중 구자철은 결국 대표팀에서 탈락을 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김보경만은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게 된다.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괜찮은 센스로 은퇴를 앞둔 박지성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황석호 (히로시마 산프레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장현수가 부상으로 팀에 이탈하며 홍명보 호에 들어갔고, 주전 센터백으로 꾸준히 출전하며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하지만 후의 황석호는 히로시마 산프레체 안에서도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간간히 출전하는 게임마저도 자신의 센터백이 아닌 풀백에서 주로 뛰어 "엔트으리" 논란의 중심에 섰다.

 

"우리 선수들 발보다 손이 빠른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첫 경기 러시아전에서 황석호는 많은 여론의 질타를 맞는다. 이근호의 행운의 슛으로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후반 31분 근육경련을 일으킨 홍정호를 대신 황석호가 그라운드로 들어온다. 그리고 후반 34분 자고예프의 슈팅이 정성룡 골키퍼를 맞고 나오자 그 볼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안드레이 예센코의 가슴과 팔에 동시에 맞으며 떨어졌고 이를 알렉산더 케르자코프가 리바운드 하여 동점골을 터트렸다. 당시 태클을 했어도 막을 수 있었을진 모르겠으나 휘슬도 불기전에 오프사이드를 주장하며 손을 들고 수비를 하지 않은 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당시 러시아전 이후로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었고 속도와 파워로 인해 센터백부터 수미형 미드필더까지 볼 수 있는 유틸성을 가졌지만 결국 아직도 대표팀과는 연이 없는 상태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박주호 (울산 현대)

 

 

박주호는 지난 대회에도 출전했지만, 브라질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시 마인츠에서 최우수 왼쪽 수비수로 정평이 나있던 박주호가 최종 명단에서 빠졌던 것이다. 결국 김진수와 QPR의 윤석영이 대표팀으로 발탁되면서 앞서 설명한 "엔트으리" 논란에 피해자의 중심에 섰던 박주호였다. 김진수의 부상으로 박주호는 월드컵 엔트리에 발탁되었지만 부상을 핑계로 3게임에서 1분도 뛰지 못하면서 평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마인츠에서의 실력으로 도르트문트에 입단했지만 적은 출장 기회와 수비 실수로 박주호의 폼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2017-18 시즌 도르트문트의 새 감독 페터 보츠는 박주호가 누군지 모른다고 할만큼 입지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결국 박주호는 K-리그 복귀를 선언했다. 그리고 중앙 미드필더로 뛰는 박주호의 폼은 다시금 빠른 속도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3월 유럽 평가전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2경기 2도움을 펼쳤고 마지막 공개 평가전인 볼리비아전에서도 이승우와 더불어 유일하게 칭찬을 받은 선수였다. 윙백이 되었든, 기성용과 함께 중원을 맡든 박주호의 이번 월드컵은 지난 브라질과 달리 빛이 날 전망이다.

 

황색언론에 있는 모든 포스팅의 저작권은 원 작성자에게 있으며, 사진 허락 없이 어떠한 형태로도 재생산, 복사, 배포될 수 없습니다.

Copyright ⓒ 황색언론 기사팀 yellow_news@naver.com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