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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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베스트 같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사실 기존의 에이스의 등번호는 단연 10번이었다. 하지만 점차 중앙에서 상대편 진영을 휘젓는 소위 10번 형 스타 플레이어들에서 측면에서 화려한 개인기나 스피드로 돌파 후 중앙 공격으로 이어지가는 공격수들이 세계적인 스타로 변모되면서 점차 에이스의 등번호는 7번으로 바뀐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7번은 최근 들어서나 박지성, 손흥민 같은 선수들의 등번호가 되었지 사실 상당히 다양한 포지션에서 7번을 달았다. 운명의 첫 번째 경기 스웨덴 전을 앞두고 있는 이때 손흥민 선수의 좋은 활약을 기대하며 등번호 7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수남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A매치 경험이 없었던 이승우가 대표팀에 발탁이 되면서 자연스레 역대 첫 A매치가 월드컵인 한국선수에 대한 관심도 돌려졌다. 그리고 그 처음이 되었던 선수가 1954년 이수남 선수였다. 이수남 선수는 1927년 2월 2일 생으로 공격수로 활약하며 감격적인 월드컵 첫 무대를 밟았다. 이 당시 활약을 바탕으로 올림픽과 아시아게임 대표로도 훌륭한 활약을 했다. 그 후 1962년 대위로 예편함과 동시에 심판으로 활동하였으며, 1983년 갑작스레 발견된 암을 이기지 못하고 1984년 별세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투톱으로 활약했던 최정민이 작고한지 달만에 그 뒤를 따라가듯 벌어진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 하기도 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김종부 (고려대학교)

 

 

김종부의 이름 앞에 언제나 붙는 수식어가 있다. '풍운아'

 

그야말로 김종부의 축구 인생은 우여곡절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축구와 관련없는 많은 파동으로 사라져간 선수다. 1983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김종부는 한국 프로팀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지켜보던 새로운 스타였다. 이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표팀 라인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주장 박창선의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골이 터졌고, 비가 억수같이 오던 2차전 불가리아전에서 두 명 사이를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발리 슛으로 동점골을 넣으며 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가져오게 한 골을 기록한다.

 

하지만 귀국한 김종부를 놓고 현대와 대우가 쟁탈전을 펼친다. 대우는 작은 형을 구단 경리 담당으로 임명하고 2년간 김종부의 가족과 접촉했으며, 현대는 고려대학교에 3억원의 시설 투자를 약속하게 된다. 결국 학교 측에서는 현대의 이적을 권유하나 당시 최고의 팀이던 대우로 가고 싶은 김종부는 결국 마찰을 겪게 된다. 여기서 2중계약 논란이 커지며 체육부가 이를 조사하겠단 입장을 밝혔고 고려대는 김종부의 제명을 요구하며 축구협회는 김종부를 월드컵 대표팀에서 빼는 충격적인 일로 이어진다. 축구계는 결국 김종부 구명운동에 나서 대표팀에 합류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1년간 두 구단의 싸움이 벌어졌다.[각주:1] 최고 절정의 기량때 1년을 경기를 뛰지 못한 김종부는 1년 뒤 어이없게 포항제철에 입단하며 결국 제 기량을 마지막까지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된다. 참고로 이 스카우트 파동 이후 K리그는 드래프트 제도를 탄생시킨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노수진 (유공 코끼리)

 

 

노수진은 미드필더 진에서 플레이어였다. 노수진은 앞선 월드컵에서도 불가리아전에 선발 출전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본격적으로 프로에 적응하며 미드필더인데도 불구하고 득점왕 경쟁을 할만큼 공격력이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볼 배급 능력 또한 탁월해 황보관 선수와 함께 유공의 막강 공격력의 핵으로 자리했다. 결국 19819년 유공 코끼리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며 최고의 절정에 올라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의 7번을 달게 되었다. 그리고는 벨기에, 스페인 전에 출전해 활약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대표팀의 3패에 빛을 발하고 말았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신홍기 (현대 호랑이)

 

 

날카로운 태클, 엄청난 지구력으로 90년대 한국 프로축구의 왼쪽에는 신홍기가 있었다. 원래 좌측 공격수로 대학시절까지 활약을 했던 신홍기였지만 당시 현대 호랑이에는 변병주, 최강희가 있었던 탓에 차범근 감독은 왼쪽 수비수로 권유받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맞상대 선수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최순호였다. 하지만 신홍기는 최순호를 완벽하게 막아내며 바로 주전자리를 맡는다. 최고의 허슬 넘치는 승부근성에 뛰어난 태클 스킬과 스피드까지 당시 신홍기의 플레이를 경험한 공격수들은 손시레를 칠 정도였다. 그때 붙은 별명이 '저승사자' 이를 지켜본 김호 감독은 홍명보가 부상당하자 대표팀의 새로운 얼굴로 신인 신홍기를 단숨에 국가대표로 발탁했다.

 

지금도 김호 감독은 신홍기를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말하는데, 월드컵 예선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월드컵 첫 스페인전에서 살리나스에서 실점을 제공하는 패스미스를 범하는 등 좋지 않은 실력으로 마음 고생이 상당히 컸고 결국 볼리비아 전과 독일 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김도근 (전남 드래곤즈)

 

 

곽경근, 이운재 등과 함께 막내 라인으로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간 김도근은 당시 캡틴 정용환의 몸 관리를 보고 배우며 국가대표로의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드물었던 공격과의 빌드업이 가능했던 수비수로 정용환과 홍명보가 있는 대표팀에 김호 감독의 부름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결국 경기에 뛰지 못한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는 줄 알았다.

 

그리고 차범근 감독이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두고 차출했다. 대전에서 열린 홍콩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뤘으며 1997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멋진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결국 프랑스 월드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고, 멕시코 전의 하석주의 퇴장을 커버하기 위해 교체 출전했다. 네덜란드 경기에서도 선발 출전해 에드가 다비즈를 막기도 했고, 벨기에와의 경기도 출전하면서 3경기에 모두 출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경기 결과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김태영 (전남 드래곤즈)

 

 

2002년 월드컵에서의 강력한 임팩트로 알려져 있는 김태영 선수지만, 국가대표로 105경기에 나서면서 5번째 센추리 클럽 가입자인 선수다. 2002년 당시 커맨드형 홍명보, 피지컬형 최진철과 함께 파이터형 수비수였던 김태영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3백을 형성하며 4강 신화에 기여했다. 역시 우리에게 알려진건 16강 이탈리아 전에서 비에리와의 충돌 중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타이거 마스크'라는 보호대를 착용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당시 대표팀 의료진은 같은 부상을 당했던 일본의 미야모토 츠네야스가 특수 제작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온 것을 떠올렸고 당시 가시와 레이솔 소속이었던 유상철이 그 제작업자를 수소문해서 찾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전 다음날 새벽에 일본에서 제작자 두 명이 한국으로 날아와 김태영의 얼굴을 본을 떴고 10시간만에 지금의 마스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02년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 박지성은 히딩크를 따라 2003년 PSV 아인트호벤에 입단 뒤 200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을 한다. 그렇게 최고의 클럽에서 돌아온 국가대표팀에서 박지성의 레벨은 다른 선수들의 몇 단계 위에 올라와 있었다. 신인들이 다는 21번에서 에이스 7번의 바뀐 번호만큼이나 박지성의 활약은 업그레이드 되었다.

 

1차전 토고 전에서는 거의 MVP급 활약을 보여주며 토고 대표팀을 결국 무너지게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골을 비록 터트리진 못했지만 2골에 모두 관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토고의 캡틴 아발로의 무게중심을 일순간에 무너트리며 찬스를 만들었고 이에 아발로는 무리한 태클로 파울을 만든다. 앞선 전반에도 박지성에게 태클로 경고를 받은 아발로는 결국 경고누적으로 퇴장을 당하고, 이렇게 얻어낸 프리킥에 이천수가 동점골로 화답했다. 그 후 페인팅 모션 한번으로 안정환에게 노마크 찬스를 주면서 안정환의 터닝슛으로 역전골을 만들어 내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 전은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0대1로 지고 있던 후반 설기현의 측면 크로스를 조재진이 멋지게 떨궈 줬고 결국 살짝 방향만 바꾸며 극적인 무승부를 만들어 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10년 월드컵에서 박지성은 또 하나의 중책을 맡게 된다. 바로 국가대표팀 주장의 자리였다. '캡틴 박' 박지성은 기존의 주장들과 다르게 유연한 리더쉽으로 선수를 이끌어간다. 이후 하락세를 타던 대표팀에 반등의 분위기가 나타나며 조 1위 무패통과에 기여했으며 특이 이란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며 이란의 월드컵 진출을 막기도 했다. 그 후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엄청난 득점 후 산책 세레머니는 박지성의 잊을 수 없는 장면중 하나.

 

월드컵에서도 박지성의 활약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 전 수비수의 공을 빼앗아 골키퍼를 향해 단독 질주해 쐐기골을 넣으면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가장 완벽한 원정 경기에 기여했다. 결국 그리스 전의 맨 오브 더 매치(Man of the match)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후 아르헨티나 전에서 패배를 당했으나 3차전인 나이지리아 전에서 더욱 그의 능력은 풀가동되며 원정 첫 16강에 일조하게 된다. 아쉽게도 16강에서 우루과이에 막히며 8강 진출이 좌절되었지만 당시 박지성의 기량은 국가대표 전체를 이끌어 갈만큼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김보경 (카디프 시티)

 

 

박지성의 후계자라는 칭찬을 들었던 김보경이 처참히 무너진 대회가 브라질 월드컵이다. 평가전에서 무리한 드리블로 공을 빼앗으며 상대방의 역습 찬스를 수 없이 제공하면서 아쉬운 플레이들을 선보였고,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마찬가지의 활약상으로 큰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결국 리그 출장 시간 조차 줄어들면서 K리그에서 최고의 주가를 보이던 이명주와 대비되며 실전 감각 논란에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엔트리에 승선했고 러시아 전과 벨기에 전에 교체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전 후반 40분에 교체되어 나온 김보경은 홍명보 감독이 시간을 버티며 무승부라도 이끌어가겠다는 선택이었으나 그 작은 5분 안에도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였다. 점점 팬들이 우려했던 실전 감각에 대한 문제가 노출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벨기에 전에서 한국영이 빠지며 모든 공격 자원을 쏟아부어 승점을 얻어내겠다는 심상이었으나 선정, 패스, 드리블, 슈팅 뭐 하나 해내는 것이 없었다. 활동량도 형편없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손흥민 (토트넘 핫스퍼)

 

 

손흥민은 4년전 눈물을 절대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토트넘 핫스퍼에서 그의 기량은 한 차례 더 성장했으며 국가대표팀에서 제 기량을 발휘 못하는 선수이지만 그래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없어서는 안될 에이스이며 박지성의 7번을 이어받은 선수라고 할 수 있다.

 

투박한 볼터치와 아쉬운 연계플레이로 인해 심한 기복을 드러내는 손흥민이지만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침투능력과 양발을 자유롭게 이용한 폭발적인 슈팅의 장점은 월드클래스급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슈팅의 경우 어떤 슈팅과 어떤 발과도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강하게 슈팅을 터트리며 득점으로 연결된다. 드리블의 경우 2016년까지 역습상황에서의 순간 스피드만 탁월할 뿐 강한 수비축구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나 2017년 볼 운반과 더불어 한두명의 수비를 쉽게 벗겨내는 개인기가 늘었다. 앞서 설명한 오프더 볼 문제도 점차 개선이 되고 있으며 이에 국가대표팀에서도 점차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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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시 현대는 팀 해체라는 말도 안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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