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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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번호 4번은 듬직한 수비수다. 앞서 설명했던 수비수의 강한 투지도 중요하지만, 팀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의 역할을 하는 선수들의 번호가 4번인것 같다. 김판근, 최영일, 최진철, 곽태휘 같은 선수들이 비록 주장을 달았던 달지 않았던 수비에선 절대 빠질 수 없는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영리한 플레이들이 돋보이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예외로 스페인의 세스크 파브레가스 선수가 4번을 달았듯, 1986년엔 '컴퓨터 링커' 조광래 선수가 이 번호를 달기도 했다.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의 역사 오늘은 4번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강창기 (조선방직 축구단)

 

조선방직 축구단 소속의 강창기의 포지션 역시 뒤에 설명할 조광래와 같은 당시의 하프백 지금의 미드필더였다. 헝가리전과 터키전 모두 풀타임으로 출장했던 기록이 있다. 2007년 1월 7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광래 (대우 로얄즈)

 

 

연세대를 졸업한 조광래는 1982년 슈퍼리그가 출범하면서 대우 로얄즈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미드필더에서 정확한 킬패스를 구사하면서 '컴퓨터 링커'라는 별명을 받기도 했다. 당시의 '링커(Linker)'라는 용어는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데, 미드필더 지역에서 여러 포지션으로 공격을 이어준다는 의미로 바당들이면 되겠다.

 

기나긴 도전 끝에 진출한 월드컵이었지만 두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1978년)와 이탈리아(1982년)가 있던 조는 죽음의 조에 가까웠다. 대표팀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조광래였지만 월드컵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비록 지긴 했지만 월드컵 역사상 첫 골을 넣은 아르헨티나 전과 조광래의 어시스트와 김종부의 동점골로 무승부가 된 불가리아 전이었기에, 이탈리아 전에 따라 16강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대2로 지고 있긴 했지만 맹렬하게 따라붙던 후반 37분 조광래는 통한의 자살골을 넣게 되고 1대3으로 벌어진다. 최종 스코어는 2대3으로 패배. 만약 조광래의 자책골 없이 2대2로 끝났다면 비록 승리 없는 2승1무였지만 다득점에서 불가리아를 제치고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아쉬운 상황이었다.

 

물론 그때의 경기를 보면 조광래의 자책골이 없었더라도 쇄도하던 선수로 인해 골을 먹었었고, 맞은것도 손에 맞고 들어간것이라 자책골이 아니더라도 페널티킥이 되었을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이래저래 아쉬운 조광래의 월드컵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윤덕여 (현대 호랑이)

 

 

지금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는 윤덕여의 등번호 역시 4번이었다.

 

현역 시절 악착같은 승부근성의 수비수로 유명했으며 1989년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진 한일전에서 A매치를 데뷔했다. 하지만 윤덕여 역시 월드컵에서는 아픈 기억이 크다. 조별 예선 우루과이전에서 당대 최고의 공격수이자 지네딘 지단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뽑기도 했던 엔조 프란세스콜리의 전담 마크맨으로 선정된 윤덕여는 콜리와의 신경전에 경고를 받았고, 후반 25분 골키퍼로의 백패스를 심판이 시간지연 행위로 판단해 경고를 주면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이 되면서 대한민국의 월드컵 퇴장선수 1호가 되었다.

 

당시에 강팀에게 대놓고 편파판정이 있던 시기라 너무나도 억울한 퇴장이었다. 결국 0대0의 균형을 맞추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수적 열세와 편파 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골을 허용하며 0대1로 패배했다.

 


 

1994년 미국 월드

 

김판근 (LG 치타스)

 

 

'그라운드의 여우' 김판근. 1983년 세계 청소년 4강 신화의 주역으로 만 17세 242일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연소 A매치 출장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했다. 그만큼 재치있고 센스있는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앞선 별명을 얻기도 했다. 주로 오른쪽 풀백을 맡기도 했으며 풀백에서 미드필더로 이동하면서 재치있는 플레이를 선보이는 것이 특기였다.

 

조별 예선 3경기를 풀타임으로 출전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영일 (부산 대우 로얄즈)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가장 4번에 어울리는 선수는 최진철이 아니라 최영일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이나 피지컬이 월등하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끈질기고 악착같은 대인마크가 특기였다. 별명도 '수갑', '진드기' 였다. 별명만 봐도 최영일의 플레이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주장이었으며, 공교롭게도 20년 뒤인 2018년 월드컵의 단장으로 대표팀에서 같이 동행하고 있다.

 

최영일 역시 주목을 받았던 경기는 한일전이었다. 앞선 최성용이 플레이메이커인 마에조노나 나카다의 전담마크였다면. 최영일의 상대는 무조건 '카즈' 마우라 카즈요시였다. 그의 플레이는 한마디로 더티했다. 끝없이 유니폼을 잡고 다닌다거나 슬쩍 발을 밟는다거나 침을 뱉는거나 심판이 벗어나기만 하면 끝없이 반칙을 일삼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플레이로 미우라를 완벽하게 봉쇄했으며, 당시 이런 플레이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남미식 용어로 '마리사이'라는 플레이로 이를 가장 잘 썼던 선수가 최영일이었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최진철 (전북 현대 모터스)

 

 

"왜 저런 선수를 여태 뽑지 않았는가?"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이 최진철을 발탁하면서 했던 말이다. 몇 번 대표팀에 오르내리긴 했던 최진철이었지만, 막대한 2002년 월드컵을 책임질 수비수 중 하나로 발탁될 것이라고는 필자 역시 몰랐던 선수였다. 하지만 월드컵에 최진철이 등번호 4번을 달고 나타났고, 최종 지휘관을 하던 홍명보, 지독한 파이터형 수비수 김태영과 함께 강력한 피지컬과 함께 이루어진 대인마크는 세계 어느 팀도 쉽게 뜷기가 어려웠다. 뛰어난 수비에서의 커맨더 홍명보였지만 늘 문제가 되었던 대인마크와 피지컬의 문제를 김태영과 함께 최진철의 피지컬이 최고의 조합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초반 단순했던 한국의 수비전술에서 최진철은 대표팀에 오면서 더더욱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비록 한골을 주긴 했지만 이탈리아의 비에리나, 4강전에서 클로제를 막아내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결국 부상으로 이민성과 교체가 되었고 이는 바로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그 부상의 여파로 터키전에서도 출전하지 못했고 터키전 역시 경기내 최다 실점을 기록한 게임이된다. 대한민국 역대 공격라인은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만, 김태영-홍명보-최진철의 라인은 역대 대한민국 대표팀의 가장 단단한 벽이라고 생각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최진철 (전북 현대 모터스)

 

 

2004년 아시안컵의 졸전 이후 최진철은 대표팀을 은퇴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비수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지만 유일한 단점이라면 세 선수 모두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가온 2006년 월드컵은 2002년의 압박이 함께 딸려오는 대회였다. 감독이 몇 번이나 교체되면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고 또 했지만 2002년의 역대급 수비는 재현할 수가 없었다.

 

결국 최진철은 은퇴를 번복하고 36세의 노장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에 나간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대인마크는 지난 경기에 이어 토고전의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확실하게 마크하는데 성공한다. 게다가 스위스 전에서의 필리페 센데로스와의 충돌 이후 부상으로 인해 유혈사태가 벌어졌으나 붕대를 메고 계속 경기에 임한다. 하지만 결과는 0대2의 패배로 1승 1무 1패의 호성적에도 16강 진출이 좌절되면서 그의 마지막 A매치도 함께 끝나게 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조용형 (제주 유나이티드)

 

 

조용형은 앞서 설명했던 최영일, 최진철과는 다른 수비수다. 상당히 영리한 수비수라는 말이 잘 어울리며, 지금도 조용형과 뛰어보았던 현역 선수들은 베스트 플레이어에 조용형을 뽑았다. 홍명보 역시 자신의 후계자는 조용형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명보가 너무 장단점이 닮았다는게 단점이었다. 확실히 영리한 플레이와 빌드는 좋지만 홍명보와 같은 대인마크와 피지컬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양박쌍용' 이라는 막강한 공격라인을 보유한 것에 비해 초라한 수비력으로 끝없이 선수들을 실험하고 또 했다. 당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포항의 '김형일-황재원'을 비롯해 이정수, 곽태휘, 조용형, 강민수까지 끝없는 실험을 했고 결국 최종명단은 조용형, 이정수, 김형일, 강민수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2010년 중국 쇼크때 패배의 일등공신이 된 조용형이 계속해서 발탁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조용형의 모습을 달랐다.

 

그리스 전 위험한 상황에서 온몸으로 공격을 막아내며 무실점 경기를 이끈 장면이나, 3차전 나이지리아 전에서 훌륭한 수비력을 선보이며 16강 진출에 공헌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곽태휘 (알 힐랄)

 

 

곽태휘는 준수한 얼굴에 비해 그는 지독한 불운과 맞서 싸웠다. 그의 왼쪽 눈은 사실살 실명에 가까우며, 평발이고 허리디스크와 어깨 근육까지 선수에서의 활약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부상으로 군대를 면제 받을 정도였다. 또한 대표팀에서 곽태휘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하지만 월드컵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그의 절정은 앞선 허정무 감독 체제의 국가대표팀이었다. 곽태휘는 뛰어난 수비력도 훌륭했지만 세트피스나 수비라인이 올라와 공격을 할때 어김없이 골을 넣었던 '골 넣는 수비수'의 최고였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너무 부상이 잦았다. 국가대표를 데뷔하자마자 전남에서 발목 인대 부상으로 시즌 절반이 날라갔고, 복귀해서 헤딩 추가골을 기록한 뒤 다시 반대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이 되었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실력에 허정무 감독은 곽태휘를 발탁하지만 마지막 평가전인 벨라루스 평가전에서 다시 왼무릎 내측인대 파열로 대표팀에서 낙마했다.

 

그리고 다시금 2014년의 찬스가 왔다. 하지만 부랴부랴 감독을 홍명보로 급 바꾼 대표팀에게 팀워크를 맞춰볼 시간은 월등이 불리했다. 결국 홍명보는 앞선 올림픽에서의 '홍정호-김영권' 라인에 밀리면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박수로써 응원했다. 월드컵을 마치고 당시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닌 선수들이 대표팀 분위기에 섞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오반석 (제주 유나이티드)

 

 

오반석은 소속팀 제주 유나이티드에도 같은 번호인 4번을 달고 있다.

 

2011년 제주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원클럽맨으로 지금까지 제주 유나이티드를 이끌어 오고 있다. 하지만 국가대표에 오반석의 이름은 낯설었다. 신체적인 조건이 뛰어나지만 빌드업 면에서 부족한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상으로 김민재가 엔트리에 빠지면서 차선책이었던 오반석을 다시금 대표팀에 승선시켰다. 정확한 위치 선정과 190에 가까운 키로 만드는 안정된 수비력이 장점이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발이 조금 느리며 자기 역할에만 충실하려다 보니 창의적인 플레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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