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 신인상의 선택들 (1995-1999)
- 황색문화/음악
- 2018. 12. 17.
그래미 신인상. 누가 망하고, 누가 흥했나. (사진=구글이미지)
1995년 셰릴 크로우 (Sheryl Crow)
셰릴 크로우 (Sheryl Crow) (사진=구글이미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돈 헨리(Don Henley) 등 숱한 가수들의 백보컬을 도맡아온 중고신인 셰릴 크로우는 스팅의 프로듀서와 함께한 셀프타이틀 첫 앨범이 레이블의 결정으로 무산되는 좌절을 겪은 후 다시 음악적인 멘토이자 사귀던 남자친구인 기타리스트 케빈 길버트와 그의 지인들, 그리고 케빈 길버트의 친구인 프로듀서 빌 버트렐의 도움을 얻어 공식 첫 앨범으로 데뷔한다. 비록 서른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앨범을 냈지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1995년에 뜬금없이 같은 앨범의 타이틀곡인 'All I Wanna Do'의 대히트로 캐나다와 미국을 포함한 북미권에서만 1천만장의 음반을 파는 대박을 이뤄냈다. 당해 유력한 그래미 신인상 후보에 오른 셰릴 크로우와 경쟁한 아티스트는 유로팝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인 스웨덴의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와 한참 얼터니티브 록의 기수로 새롭게 등장한 네오펑크 그룹인 그린 데이(Green Day)가 있었다.
그래미 신인상을 놓친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유로팝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사진=구글이미지)
그 후로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유럽을 휩쓸고 온 기세를 그대로 미국을 폭격하며 1집인 'Wheel of Fortune'의 곡들을 새롭게 마스터링하고 히트 싱글인 'The Sign'을 포함시켜 전세계 2천 3백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부정못할 실적을 냈다. 그린 데이는 1993년부터 레코딩을 시작해 1994년 발표한 메이저 데뷔앨범인 'Dookie'를 발표했고 그 앨범 하나만으로도 2013년까지 2천만장 이상을 발매하며 오프스프링(The Offspring)과 함께 네오펑크의 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두 아티스트 모두 전 세계에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고배를 마신것이다. 한편 그 둘을 제치고 단숨에 스타로 뛰어오른 셰릴 크로우는 그 후 첫 앨범의 기세를 계속 이어가지는 못한 채 첫 앨범을 함께한 음악동료들인 빌 버트렐, 존 오브라이언 등 여러 주변인물들과의 결별이라는 악재와 여러 사회문제적인 메세지를 담아낸 1996년의 두번째 앨범에서부터 기세를 잃고 주춤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1994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월드 뮤직 어워드를 비롯한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그린 데이는 청년 문화와 펑크 록의 기수로 군림하며 전 세계 2억장이 넘는 음반판매고를 기록한 명실상부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
1997년 리앤 라임스 (LeAnn Rimes)
리앤 라임스 (LeAnn Rimes) (사진=구글이미지)
최고의 뮤지션들만 선택한다는 007 시리즈의 주제가도 담당하며 월드 와이드 400만장 판매의 기록을 세운 굴지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가비지(Garbage)와 시인, 여배우, 작가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면모로 화제가 되었던 포크 뮤지션 쥬얼(Jewel), 'Don't speak' 한 곡으로 세계를 뒤집어놓고 전 세계 20대들의 취향을 저격해 1천만장 다이아몬드의 거탑을 쌓아올린 노 다웃(No Doubt), 혜성처럼 등장한 R&B의 신예 토니 리치 프로젝트 (The Tony Rich Project)등 쟁쟁한 이름들이 올라온 이 해의 승자는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신예 리앤 라임스가 되었다. 1982년생 리앤 라임스가 이 상을 수상할 때의 나이는 고작 15살이었고, 후보 보컬리스트 중 최연장자인 가비지의 보컬 셜리 맨슨의 나이는 66년생으로 한국나이 31살이었다. 열여섯이나 차이가 났다.
물론 리앤 라임스의 음악성은 뛰어났고, 'Blue' 앨범은 5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다음 앨범에도 4백만장, 1백만장의 판매량을 보이며 정상의 자리에서 완만한 하락세로 내려가다 2000년대초 본인이 출연한 영화인 코요테 어글리의 영미권에서의 대 히트와 영화 O.S.T의 히트 싱글인 'Can't fight the moonlight'의 기세를 업은 앨범이 5백만장 판매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나서 현재는 빌보드 차트보다는 가십지에 더 자주 모습을 보이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인 컨트리의 디바였던지라 미국에서 정하는 시상식에는 강했으나 컨트리 보컬로만 유명세와 이름이 있었을 뿐 미국 이외의 지역을 벗어나 캐나다나 뉴질랜드 정도를 제하면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의 월드 와이드급 히트곡이라고 할만한 곡은 영화 코요테 어글리의 삽입곡인 2000년대초 Can't Fight Moonlight의 반짝 히트가 그녀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그나마도 인기가 다 식고 나서는 다시 미국 내에서만 이름이 오가는 아티스트로 돌아온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생각한다. 단지 그렇게 올라와서 그렇게 내려왔을 뿐. 전년도 후티 앤 더 블로우피쉬(Hootie And The Blowfish)가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이나 앨라니스 모리셋(Alanis Morissette), 브랜디(Brandy), 조안 오스본(Joan Osborne) 등의 쟁쟁한 여성 아티스트들을 모두 꺾고 신인상을 받았기에 여성 아티스트를 배척한다는 일부의 비판을 수용한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이 이후로 7년간 여성 아티스트에게만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NARAS는 여성아티스트를 너무 편애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게 된다.
1998년 폴라 콜 (Paula Cole)
폴라 콜 (Paula Cole) (사진=구글이미지)
그래미가 이변을 연출하는 건 굉장히 자주 있던 일이었고 폴라 콜의 2집인 'This Fire'는 더블 플래티넘의 성과를 낸 컨트리, 얼터너티브 록의 수작이자 그래미상에서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최고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 부문 등의 7개의 상을 수상한 명반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후보자들이 너무나도 쟁쟁했고 성과가 컸다.
당 해의 후보들 중 하나였던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이야 말해봤자 입만 아픈 입지전적인 성장과정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표본이자 트리플 플래티넘을 이뤄낸 얼터너티브 팝의 양작인 'Tidal'앨범을 발매했고 또 다른 후보인 에리카 바두(Erykah Badu)는 'Baduizm'으로 화려하게 데뷔해 힙합과 소울보컬을 융합한 '네오 소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해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장르를 선도해나가는 와중에도 트리플 플래티넘이라는 대박을 쳤다.
퍼프 대디는 1998년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상 획득에 실패하며 그래미 어워드는 흑인음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붙였다. (사진=구글이미지)
지금은 논란이 많은 퍼프 대디 1(Puff Daddy) 역시 애초부터 래퍼 포지션을 넘어서 힙합과 R&B까지 모두 성공적인 성과를 낸 경력이 있는 히트 프로듀서의 감으로 친우(親友)였던 래퍼 노토리어스 B.I.G.(Notorious B.I.G.)의 추모곡 'I'll be missing you'와 또 다른 싱글 'Can't nobody hold me down'의 연타석 홈런에 힘입어 앨범 판매량만 해도 월드 와이드 9백만장 판매의 금자탑을 세웠고 자신이 작곡과 프로듀서로 참여한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Honey'와 자신이 피처링에 참여한 노토리어스 BIG의 'Mo Money Mo Problems', 프로듀서로 참여한 보이즈 투 멘(Boyz II Men)의 '4 Sesons of Loneliness'까지 빌보드 차트를 정복하며 1998년은 명실공히 상업적으로 힙합과 소울이 석권한 해였다. 2
퍼프 대디와 호각을 이룬 또 다른 후보는 세계를 휩쓴 보이밴드였던 형제밴드 핸슨(Hanson)이었다. 핸슨의 메이저 데뷔앨범인 'Middle of Nowhere'의 수록곡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익히 알려진 명곡 'MMMbop'은 상기의 퍼프 대디의 첫 싱글 'Can't Nobody Hold Me Down'을 몰아내고 빌보드 핫 100(싱글차트)의 정상에 등극했고 총 13개국에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미국에서만 4백만장, 전 세계 1천만장의 판매를 이루어내며 초 대박 데뷔앨범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모든 후보들을 제치고 수상했다는 걸 증명하기엔 아쉽게도 폴라 콜의 성과가 굉장히 초라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의도적으로 NARAS의 수뇌들이 흑인음악을 배제하려는 백인 인종차별자들의 모임 아니냐는 논란만 붙어다니게 된다.
1999년 로린 힐 (Lauryn Hill)
로린 힐 (Lauryn Hill) (사진=구글이미지)
로린 힐은 분명 힙합 역사에 남을 여성 래퍼이며, 1999년 최정상 보컬그룹으로 전성기에 돌입하기 직전의 백스트리트 보이즈(Backstreet Boys)나 저 멀리 크로스오버 진영에서 모습을 드러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 호주에서 한참 기세를 올리고 있던 나탈리 임브룰리아(Natalie Imbruglia), 컨트리의 신예였던 딕시 칙스(Dixie Chicks)까지 모두 로린 힐의 전성기 음악성을 넘어서기는 요원해 보였다. 그렇게 1999년은 작년의 억울한 패착을 설욕한 흑인음악과 힙합의 승리로 남은 한 해였지만 정작 논란거리는 음악성이나 판매량이 아니었다.
이미 로린힐은 5년전 와이클리프 쟝(좌), 프라즈 마이클(우)과 함께 푸지스라는 그룹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음에도 신인상을 획득해 많은 의문을 만들어냈다. (사진=구글이미지)
로린 힐은 이미 5년전인 1994년 데뷔해, 첫 앨범의 지지부진함을 뒤로 한 채 두번째 앨범의 수록곡 'Killing me softly'로 미국 전체를 뒤흔든 퓨지스(Fugees)라는 그룹의 일원이었고, 3년간 월드 와이드 2천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넘겼던 인기 그룹이었다. 그리고 1997년 팀이 해체한 후(사실 그룹은 잠정적 활동중지를 선언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로린 힐의 2회의 출산이었다.) 1999년 로린 힐의 솔로 앨범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이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앨범은 음악성과 'Doo wap'이라는 히트 싱글에 힘입어 8백만장 판매의 성과를 낸 엄청난 앨범이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미 데뷔한 아티스트의 솔로 프로젝트나 앨범을 신인 가수와 같은 선에 둬도 괜찮은가?' 라는 식의 논쟁거리는 당시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그렇게 빌보드 신인상은 공신력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
Copyright ⓒ KHAI
ⓒ KHAI
'황색문화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가수였다 (0) | 2019.04.26 |
---|---|
그래미 신인상의 선택들 (2001-2005) (0) | 2019.01.02 |
그래미 신인상의 선택들 (1979-1994) (1) | 2018.12.14 |
Carry Diamond - EXPERIMENT : [실험] EP (0) | 2018.08.15 |
닐로 사태에 이은 숀 사태 (0) | 2018.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