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 신인상의 선택들 (1979-1994)
- 황색문화/음악
- 2018. 12. 14.
바야흐로 연말, 시상식의 계절이 왔다. TV를 틀면 어딘가의 축하공연이나 가요제, 연기대상 시상식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오늘의 수상자가 어제의 시상자일 수도 있고 언젠가 고배를 마신 사람은 다시금 환하게 풀리는 때도 있는 것이 수상대에서의 일 아니었던가. 어떨 때는 누군가의 수상이 환영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쉬운 선택이라거나 편향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고 무관에 그친 누군가가 오히려 역사 속에 남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면서도 그 누구도 어찌될 지 모르는 일이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연기대상에서 김명민과 공동수상을 한 송승헌을 떠올려보자.
그래미 어워드 (GRAMMY Award) (사진=구글이미지)
비난은 찰나일 수 있지만 기록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래미의 선택은 찰나이며 기록은 남았지만 비난 역시 영원했었던 걸 감안한다면 과연 어떤 사례들이 존재할 것인가. 특히나 신인상은 당연히 커리어상 한 번 밖에 타지 못하는 상 아니었던가.
태고적부터 찾아보는 것은 작성하는 필자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모두 피곤할 수 있으므로 당장 유명한 사례부터 나열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부만 작성하기로 한다. 탈락한 후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상자들이 롱런하지 못했거나 유명세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지라 혹 해당 아티스트들의 팬이 혹시 계시다면 삼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다.
1979년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 (A taste of Honey)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 (A taste of Honey) (사진=구글이미지)
재니스 마리 존슨(Janice-Marie Johnson)과 페리 키블(Perry Kibble)이 결성한 밴드인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는 1971년 결성 후 1978년의 첫 앨범까지 기나긴 활동을 이어오던 미국의 디스코 그룹으로, 경쾌하고 신나는 곡들과 감성적인 곡들을 혼재시켜 '낮과 밤을 함께 지배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1979년 그래미 신인상을 수상한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는 다음해 R&B 차트에서 60위권대의 성적을 올리며 부진하지만 1981년 사카모토 큐 원곡의 '위를 보고 걷자'의 영어판 'Sukiyaki'를 디스코로 리메이크한 커버곡으로 다시금 빌보드 1위를 석권하며 마지막 전성기를 마친다.
한편 인기가 식으며 1984년에 거의 해체된 이 그룹에 신인상의 영예를 빼앗긴 그룹으로는 인디 록의 거물인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적어도 어 테이스트 오버 허니보다는 훨씬 오래 활동하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호사를 누린 미국 뉴웨이브의 자존심 더 카스(The Cars), 아직까지도 왕성히 활동하는 거장 블루스 기타리스트 크리스 레아(Chris Rea), 그리고 역시 4년 뒤 트리플 플래티넘 1의 기록을 세우며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게 되고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중인 거장 연주자들이 모인 그룹 토토(Toto)가 있었다.
1981년 크리스토퍼 크로스 (Christopher Cross)
크리스토퍼 크로스 (Christopher Cross) (사진=구글이미지)
필자가 매우 좋아하는 아티스트이자, 아델(Adele)의 등장 이전까지 그래미 4관왕을 유일무이하게 석권한 이름으로 남아있던 크리스토퍼 크로스는 1981년 셀프타이틀 앨범인 'Christopher Cross'로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싱글상,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신인상을 모두 석권한 재능있는 뮤지션이었고 특히나 앨범상은 그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걸작 'The Wall'을 제치고 수상한 결과였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주제가까지 제공하면서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그도 불과 1년 뒤인 1985년 3번째 앨범이 빌보드 100에서 50위권에도 못드는 초라한 성적을 내고는 결국 대중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1986년 브루스 혼스비와 더 레인지 (Bruce Hornsby and The Range)
브루스 혼스비와 더 레인지 (Bruce Hornsby and The Range) (사진=구글이미지)
'The way is it'은 브루스 혼스비의 이름을 알린 앨범이었다. 그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무려 20개가 넘어가는 천재형 뮤지션에다가 인종관계, 경제에 대해 큰 메세지도 던질 줄 아는 의식있는 뮤지션이었지만 당시에 그와 같이 후보에 오른 뮤지션들은 영국 소울팝의 대변자인 심플리 레드(Simply Red)와 원 히트 원더로 끝났지만 팀벅3(Timbuk3)이 있었다. 브루스 혼스비가 데뷔앨범 하나로 원히트 원더 취급을 받고 오히려 자기 곡을 샘플링한 투팍(2Pac)의 'Changes'가 더 유명해진 반면 심플리 레드는 브릿 어워즈, 골든 유로파를 모두 수상하고 월드 와이드 6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1990년 밀리 바닐리 (Milli Vanilli)
밀리 바닐리 (Milli Vanilli) (사진=구글이미지)
1988년, 꽃미남 둘이 모인 듀오 밀리 바닐리가 'Girl you know it's true' 라는 싱글로 혜성처럼 등장해 전세계 차트를 석권하는 대 히트를 친다. 모든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All or Nothing' 이라는 자신만만한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들의 첫 번째 앨범은 좀 더 윗세대인 록의 에너지와 한참 태동하던 힙합과 댄스의 흥겨움, 차분하게 폭발하는 어쿠스틱의 느낌까지 맛깔나게 버무려진 명반이었다. 전부터 음악 씬의 규모는 컸지만 성향상 자국 아티스트들보다는 물건너의 아티스트들을 더 쳐주고 스콜피온스(Scorpions) 이후에 조용했던 독일을 흔들어놓은 다음, 영국과 미국을 점령하고 빌보드 1위를 너무나도 쉽게 정복했다. 이 정복자 둘에 맞서는 후보들인 여성 래퍼의 전설인 네네 체리(Nene Cherry), 굴지의 여성 포크 듀오 인디고 걸스(Indigo Girls), 뮤지컬적인 소울을 보여준 소울 투 소울(Soul to Soul)도 모두 적수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게 손쉽게 정상의 권좌에 오르고 그래미 신인상의 명예까지 얻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명예와 영광은 딱 거기까지였다.
리얼 밀리 바닐리 (Real Milly Vanilly) (사진=구글이미지)
사실 밀리 바닐리의 앨범의 노래를 부른 사람은 멤버인 롭 필라투스(Rob Pilatus)와 팹 모르반(Fab Morvan)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 5명이었다. 그중 한명인 래퍼 찰스 쇼(Charles Shaw)라는 래퍼가 1989년 신문에 밀리 바닐리의 진실을 폭로하고 1년 뒤 이 사건의 발단인 프로듀서 프랭크 파리안(Frank Farian)이 직접 사실을 밝혔다. 찰스 쇼는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앨범을 녹음할 때 받았던 금액의 2배를 합의금으로 받았고 당연히 그래미 신인상은 박탈당했다. 미국 전역에서 26건의 소송이 빗발쳤고 이들의 그래미상 무대마저도 립싱크였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래미상 투표의 주체들인 NARAS(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and Science 2)은 전에 없을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셜욕을 위해 밀리 바닐리의 둘은 'Rob&Fab'이라는 앨범을 발매해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고 밀리 바닐리의 노래를 부른 가수 5명 역시 'Real Milly Vanilly'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냈지만 이 역시 묻혀버린다. 결국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밀리 바닐리의 멤버 중 하나인 롭 필라투스는 1998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
1991년 마크 콘 (Marc Cohn)
마크 콘 (Marc Cohn) (사진=구글이미지)
마크 콘은 32살의 늦깍이 신인으로 1991년 데뷔 앨범인 셀프타이틀 'Marc Cohn'을 발표한다. 수록곡인 'Walking in memphis'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대변되는 미국식 정통 로큰롤, 컨트리의 물결을 계승했다는 평을 받았고 'True Companion' 같은 곡은 투나잇 쇼에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되는 유명세를 타며 그래미 신인상을 수상한다. 그렇게 이 당시 마크 콘에게 밀려난 아티스트로는 두 말 하면 입만 아픈 아카펠라, R&B의 전설 보이즈 투 멘(Boyz II Men)과 후에 브릿 어워드를 휩쓸고 1996년 그래미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상을 석권하게 되는 영국의 소울 아티스트 실(Seal)이 있었다. 마크 콘은 그 후로도 꾸준히 활동하지만 데뷔 앨범이 플래티넘을 한 번 기록한 이후부터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실은 'Kiss from a Rose' 라는 엄청난 명곡으로 1996년 그래미를 석권한 후 오래동안 최고의 남성 팝 보컬 퍼포먼스 반열에 이름을 올리는 거장이 되었고 보이즈 투 멘은 최고의 프로듀서 베이비페이스(Babyface)와 손잡고 이름을 날리다, 나레이션, 베이스보컬을 맡은 마이클 맥커리(Michael Mccary)의 건강이상으로 3인조로 재편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성공한 R&B 그룹에 이름을 올려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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