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성의 155구 완투, 고우석은 느낀것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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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야구 종목은 특별하다. 1996년 IOC 총회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이 허용되면서 한국과 일본이 프로선수로 팀을 출전시킨 첫 대회이며, 미국 역시 토미 라소다 감독 하에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팀을 꾸리기도 했다. 당시 4강 전에서 한국은 경희대학교 정대현이 나와 6.1이닝 동안 1 실점만을 기록하는 호투를 펼쳤지만 미국 내에서도 비난여론이 쇄도했을 정도의 오심으로 인해 3대 2로 석패하고 만다.

 

그리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붙은 팀은 숙명의 일본 대표팀이었다. 당시 일본은 모든 선수를 프로야구 선수로 꾸리려고 했으나 요미우리, 한신, 요코하마 등 센트럴 리그 팀이 선수 차출을 거부했고, 퍼시픽 리그는 각 팀에서 선수를 1명만 보내기로 결정하며 프로와 대학, 사회인이 혼재된 선수단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 출전했던 와타나베 슌스케, 스기우치 토시야, 아베 신노스케, 아카호시 노리히로는 이후 프로에 입단해 엄청난 족적을 남긴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전에 나선 선발은 당시 약관의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당시 구대성은 팔에 담 증세에도 불구하고 155구 완투를 해낸다. (사진=구글)

 

한국의 선발은 '일본 킬러' 구대성, 하지만 구대성은 경기 전날 담에 걸려 팔도 제대로 뻗기 힘든 상태에서, 김인식 코치가 구대성에게 컨디션 여부를 물어보았고 괜찮다는 이야기만 듣고 곧바로 선발 통보를 했다고 한다. 다른 카더라로는 아파서 던질 수 없다고 했지만, 왜 못 던지느냐고 말하고 결국 웃으며 선발을 결정했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당시 구대성은 트레이너가 밤잠까지 설치면서 피를 뽑고, 마사지를 받아 근육을 풀어가면서 출전을 했다고 한다. 초반에는 제구 난조를 보이기도 했지만 점차 컨디션을 되찾아가며 9이닝 155구, 11 삼진을 잡아내며 대한민국에 동메달을 안겼다.

 

그에 반해 이번 WBC에 나선 고우석은 6일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평가전에 나선 뒤 목과 어깨 쪽에 불편함을 호소하며 내려왔고 결국 대회 내내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첫 경기인 호주, 일본전에서는 3~4일의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투구를 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단순 근육통으로 중요한 경기 내내 1이닝도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은 앞선 구대성의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투구도 못할 정도의 부상임에도 불구하고 더그아웃에서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자유롭게 어깨를 드는 모습을 보여 의아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결국 담 증세로 인해 고우석은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귀국한다. (사진=구글)

 

뿐만 아니라 WBC 전의 한 발언도 문제가 되었다. 공식 입장이 아닌 농담이었지만 "던질 곳이 없다면 안 아픈 곳에 맞히겠다"는 말이 경기 내내 일본 여론을 자극시켰다. 농담이라 웃어넘기면 되지 않겠냐는 일부 팬들의 말도 있지만, WBC 1회 때 이치로의 "단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고 싶다, 대결한 상대가 앞으로 30년은 일본의 상대가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기고 싶다. (ただ勝つだけじゃなく、すごいと思わせたい。戦った相手が “向こう30年は日本に手は出せないな” という感じで勝ちたいと思う)"라는 발언을 한국야구 아직 30년은 멀었다는 식으로 왜곡한 뒤에 대회 내내 이치로를 조롱하던 것을 기억하면 말이다.

 

대회 내내 혼신을 다해 헌신한 원태인의 18번을 직접 달고서 한 이닝이라도 던져보려는 의지, 문제가 될 발언일 것을 알면서도 농담으로라도 여론을 자극해 버린 뒤 경기에 나서지 못한 책임감까지 고우석은 23년 전 구대성의 155구를 보고 느낀 것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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