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버드 10회: 포르노그래피와 성착취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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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박사방'의 운영자 중 한명인 조주빈(24)은 결국 검찰로 넘겨졌다. 오전 8시께 경찰서를 나서며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는 의뭉스런 말을 남긴채 묵묵부답으로 떠났다. 이번 사건에 대해 중형 이상의 처벌을 '박사방'의 모든 이에게 가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최근 분노로 인해 포르노그래피와 성착취의 혼동이 오는 주장들에 대해 옐로우버드의 불토리 님의 글을 여기에 옮긴다.

 


 

요즘 올라오는 몇몇 글들 보면, 포르노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n번방과 같은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언뜻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포르노를 금지하던 말던 조 씨 같은 괴물은 존재했을 테니깐요. 그 사람들이 포르노를 못 봐서 n번방을 만든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괴물들이 자기들을 정당화하고 세력을 넓히고 유지시키는 데 포르노를 터부시하는 풍조가 기여했던 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비슷한 논지로 다른 글에 댓글을 달긴 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 많은 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글로 올립니다.

 

n번방 놈들이 자기정당화 하던 짓거리들을 찾아보시면 아실 겁니다. 어떻게 자신들의 착취 범죄를 음란으로 포장했는지를 말이에요. 피해자를 탓하는 2차 가해자들도 보면, n번방도 나쁜놈인데 일탈계를 만든 피해자들도 나빴다는 식으로 양비론을 펼칩니다. 음란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이런 2차 가해에도 사상적 뒷받침을 합니다.

 

2차가해2차 가해 (사진=구글이미지)

 

협박, 폭력, 인격말살이 동원된 성 착취가 반윤리적이고 뿌리 뽑아야 할 악이라는 건 무릇 자명한 사실입니다만, 원초적 자극을 생산하는 '음란'는 성착취와는 본질적으로 달리 사유해야 할 것들입니다. 자기동의가 전제되지 않은 스너프물은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 성착취입니다. 그렇지만 음란과 성착취를 구분하지 못하는 법체계와 사회인식은 되려 착취 가해자들과 2차 가해자들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포르노를 범죄시하게 된 과정 자체가 성 착취를 음란과 구분하지 않고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사회인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착취를 음란과 동일시하고 음란을 범죄로 만들었습니다. 형벌이 부과된 건 중세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였고 유럽의 전체주의자,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그 문화권의 역사상 가장 엄격한 포르노 규제 정책을 추진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부는 영화 내의 키스 씬까지 검열했었어요. 이 규제가 풀린 게 전후 연합군 점령 하에서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거였고요.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며 음란을 터부시하는 사상에 맞서왔습니다. 형법상의 음란죄가 전후 사회에서 근대적 폐습이라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6~70년대 전 세계의 포르노 합법화의 과정을 주도했던 게 신좌파 쪽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포르노에 대해 가장 완화된 국가가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진보 정치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나라들이고요.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포르노그라피는 오히려 진보의 전유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합법으로 만들었던 사상적 기반을 빌헬름 라이히나 성 긍정 페미니스트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제공했습니다.

 

빌헬름라이히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사진=구글이미지)

욕구에 대한 억제가 인류의 진보로 보시는 분도 계시던데, 제 생각은 이와 좀 다릅니다. 극단적으로 욕구를 억제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이슬람 문화권이나 역사상 존재했던 몇몇 종교 공동체 정도인데, 이런 사회가 과연 진보한 사회인지는 참 의심스럽거든요. 전 오히려 퇴행적이고 반인륜적인 사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가 이루어지는 데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중요했고, 하부구조의 형성에는 성욕과 식욕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두아르트의 <풍속의 역사>라든지 <사생활의 역사> 같은 책들을 보면 인간의 문화가 어떻게 성욕과 식욕을 토대로 발전해왔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는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되 어떻게 바르게 표출할지 묻는 것이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성욕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승화의 대상인 거죠.

 

무슨 욕구든 항상 '윤리적 사유'를 기초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종 음란을 성착취와 분간하지 못하고 그 윤리적 잣대를 음란에 조준경을 맞춰왔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포르노그래피와 성착취를 구분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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