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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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을 준비하려고 이번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의 공식 등번호 발표를 기다렸지만, 유난히 올해는 등번호 확정 소식이 늦었고, 공식 명단이 FIFA에 제출될때까지도 발표되지 않아서 애가 탔다. 그리고 어제서야 2018 러시아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의 등번호가 공식 공개 되었고, 이에 오늘부터 본격적인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의 등번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진출하면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총 10번의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기획에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의 자료는 뺄려고 생각했었다. 사진 자료 및 선수들의 정보가 구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선수 고유의 등번호가 주어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사진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꼭 맨 앞에 그들의 도전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짧은 소개라도 써보기로 했다. 지금부터 황색언론 월드컵 프로젝트 '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를 시작한다.


축구에서 등번호 1번은 단연 골키퍼다. 1954년 홍덕영 선수는 가슴에 피멍이 들 정도로 강호 헝가리와 터키의 공격을 수 차례 막아냈고, 1998년 김병지 선수는 5대0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선방하는 모습을 보여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2002년 이운재 선수는 월드컵 8강전에서 4번째 킥커로 나선 호아킨의 슛을 막아내고 두 손을 맞잡으면서 많은 국민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다른 선수들의 실수는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실수 한번에는 실점까지 연결되는 운명의 번호 1번. 과연 역대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그 1번을 누가 달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홍덕영 (조선방직 축구단)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하지만 광복 직후에 열린 경기로 인해 대표팀은 두 가지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반드시 일본을 이길 것, 그리고 일본사람은 더 이상 한국에 발을 디딜 수 없으니 어웨이로 두 게임을 치를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막 전쟁에서 벗어난 한국 대표팀과 일본 팀과의 차이는 컸다. 하지만 홍덕영 골키퍼는 2경기를 3실점으로 막아내며 월드컵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월드컵에 진출했어도 스위스까지 가기가 힘들었다. 결국 여러 나라[각주:1]를 거쳐 무려 1주일만에 스위스를 도착했고, 첫 경기 이틀전 밤 10시에 1군 11명만이 간신히 도착했다. 당시 등번호가 필요하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해 도착 후 선수들이 등번호를 꿰매면서 경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만난 첫 번째 상대는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푸스카츠의 헝가리. 교체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4명이나 쥐가 나는 바람에 빠지면서 7명만이 경기를 뛰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9대0의 패배는 오히려 선전이었다. 홍덕영은 이날 경기에 대해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골대를 맞았는데 위잉 소리가 났고,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실제로 갈비뼈가 골절 될 정도였으며 그의 투혼에 일부 관중들은 홍덕영 선수의 사인을 받아가기도 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병득 (할렐루야 축구단)

 

 

1980년 할렐루야 축구단이 창단하자 합류하면서 원년 멤버로 참여했던 골키퍼 조병득은 1983년 수퍼리그에서 원년 우승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한국프로축구 최정상급 골키퍼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월드컵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당시 국가대표에는 라이벌 오연교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연교는 조별예선 3경기에서 모두 아쉬운 경기력을 보이며 조병득이 골키퍼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조병득은 그 후 아마로 전환했음에도 할렐루야에 남아있다가 1987년 포철 아톰스에 입단한다. 은퇴 이후 유독 차범근과 많은 인연이 되어 차범근 감독 체제에서 코치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때는 아시아예선 도중 할렐루야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평석 수석코치 체제로 바뀌게 된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김풍주 (대우 로얄즈)

 

 

1983년 청소년축구 '4강 신화'를 이끌었던 주역으로 이미 당시에도 많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프로팀에 뛰고 있었던 실력있는 골키퍼였다. 191cm의 큰 키였으나 안정감있는 플레이로 차세대 국가대표 골리로 거론되었지만 월드컵때마다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단 1실점만을 하는 맹활약을 보였으나, 본선 대회 직전에 다리 부상으로 최인영 골키퍼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으며, 그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낙마했다. 서동명 이전에 대한민국 최장신 골키퍼였으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국가대표에서 큰 활약을 했음에도 부상으로 유독 월드컵에서는 운이 없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인영 (현대 호랑이)

 

 

월드컵에서 최인영만큼 희비가 엇갈리는 선수도 없을 것이다. 1986년에도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낙마하지만, 반대로 1990년에는 김풍주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첫 주전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던 최인영은 그의 실책으로 실점을 하게 되고 16강 탈락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되며 맹비난을 받는다. 이에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받은 최인영은 국가대표 은퇴를 결심하지만 김호 감독의 막무가내로 다시 한번 대표팀 골키퍼를 맡게 된다.

 

결국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팀 주장까지 겸임하는 최인영이었지만 내적으로 엄청난 부담과 압박에 지쳐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볼리비아전 후 연습때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대학생 이운재를 독일전에서 세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결국 최인영을 기용했다. 하지만 결국 3실점을 하면서 국민들의 질타를 받았고, 이전부터 압박을 받아온 최인영에게 너무나도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최인영의 훌륭한 경험은 울산현대에서 후배 김병지를 키워냈고, 그 후 최강희 감독의 러브콜을 받아 전북 현대 모터스의 골키퍼 코치가 되면서 권순태를 키워내기도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김병지 (울산 현대 호랑이)

 

 

당시 최고의 축구스타는 단연 '김병지'였다. 꼬마들이 동네축구를 할때도 골키퍼는 김병지였을 정도였다.

 

1995년 코리아컵에서 튀는 패션과 기존 골키퍼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탄력으로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킨 김병지는 1998년 아시아 예선에서도 훌륭한 선방을 선보이며 본선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의 최고의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축구사의 악몽 중 하나인 네덜란드 전에서 나온다. 앞서 설명한 피멍이 들도록 막아냈다는 홍덕영 골키퍼처럼 화려한 공격진을 자랑하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5실점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로 눈에 띄는 플레이어였다. 김병지의 1998년 최종 성적은 9실점이었지만, 유효슈팅 56개중 47개를 선방해내면서 야신상 후보로까지 오르기도 했다. 앞선 미국월드컵에서 16강에 그친 벨기에의 미셸 프뢰돔이 야신상을 받은 전례를 미루어 대한민국이 16강 정도에만 진출했더라도 야신상을 획득할 수도 있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히딩크가 한국 감독으로 부임했을때도 초반에 언급한 선수 중 하나가 김병지였다. 월드컵의 모습에서 믿을 수 있는 골키퍼가 정해져 있다는 것에 큰 믿음을 가지며 재회를 기다린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아직도 회자되는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 전에서 무리하게 공을 몰고 가다 상대 미드필더에게 공을 뺏기는 아찔한 실수를 범했고 결국 라이벌 이운재 골키퍼에게 기회가 갔다.

 

94년 최인영 선수를 대신에 경기에 나선 이운재는 다음 월드컵에서의 미래가 기대되었지만, 간염에 걸리면서 체력이 급속도로 저하되고 월드컵은 커녕 선수생활이 어떻게 이어질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앞선 김병지의 치명적인 실책으로 인해 자신에게 온 기회를 이운재는 절대적으로 놓치지 않았다. 4강까지 오르면서 2실점만을 허용했고,올리버 칸이 없었더라면 야신상을 획득할 수도 있었다. 8강 스페인전에서 호아킨의 승부차기를 막아내며 4강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2년 월드컵 이후 부진한 대표팀의 성적만큼이나 이운재의 실력도 도마에 올랐다. 이에 팬들은 다시금 김병지가 대표팀에 올라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국 김병지가 본선 엔트리에서 탈락하자, 월드컵에 탈락한 것이 아쉬운 선수 1위로 뽑히기도 했을 정도였다. 지만 이운재는 2002년 월드컵보다 오히려 화려한 모습을 독일에서 선보이며 불신을 잠식시켰다. 특히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는 압도적이었다. 간신히 골라인에 걸린 슈팅을 감각적으로 선방해내기도 했고, 후반 막판 티에리 앙리와의 1대1 상황을 쳐내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논란으로 소속팀에서는 후배 박호진에게 점점 밀리는 상황을 보이며 이후로 여론들에서는 이운재의 체중과 순발력에 대해 점점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9년이 되면서 이운재의 운동량과 순발력에 대한 실점 허용이 늘면서 더욱 논란은 커져갔다. 특히 김영광, 정성룡 등의 젊은 골키퍼가 등장하는 상황에서의 세대교체 필요성, 실점할때마다 화내는 모습들에서의 팀워크, 심지어 골키퍼 코치 정기동이 이운재를 편애한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결국 대표팀 승선에는 성공했지만 그리스와의 첫 경기에서 정성룡이 주전 골키퍼가 되면서 마지막 우루과이전까지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며 나이지리아전을 끝으로 133경기 출전 115실점의 기록으로 국가대표 골키퍼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정성룡 (수원 삼성 블루윙즈)

 

 

남아공 월드컵에서 첫 원정 16강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던 대표팀이기에 정성룡의 평가도 그대로 좋게 이어졌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는...

 

특히나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은 오초아(멕시코), 나바스(코스타리카), 노이어(독일), 하워드(미국), 오스피나(콜롬비아) 등 골키퍼들이 미친 선방을 보여주며 골키퍼 월드컵이라고 할만큼 골키퍼들의 실력이 출중했던 월드컵인데 비해 가장 비난을 많이 먹은 골키퍼 정성룡이었다. 러시아 전에서는 여러차례 실점위기를 피했지만 알제리전부터는 최악의 판단력으로 영국 스카이스포츠는 재앙과도 같았다는 평을 내리며 최저평점을 주기도 했다. 게다가 3차전 벨기에 전에서 김승규가 여러번의 선방으로 더욱 비교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워낙 많은 논란의 대표팀이었기에 정성룡의 경기력이 오히려 그 논란에 묻힐 정도였다. 하지만 귀국길에 올린 SNS의 '퐈이야' 발언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더욱 실망감을 안겨다주기도 했다.

 

하지만 슈퍼세이브능력은 부족했더라도 뛰어난 골킥으로 속공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존 국대 엔트리에서의 치열한 골키퍼 주전 다툼으로 사이가 안좋았던 선수들과는 달리 김승규와 김진현에게 조언과 파트너 역할을 잘 해주면서 당시 슈틸리케 감독도 "정성룡이 No.1 키퍼 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김승규 (비셀 고베)

 

 

앞선 브라질 월드컵에서 정성룡의 부진과 더불어 더욱 빛난 김승규는 심지어 오른 손가락 부상이었음에 후에 밝혀지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하면서 김진현이 활약하고, 신태용 감독이 부임할땐 권순태와 조현우가 활약하면서 아직도 완벽한 대한민국 주전 골키퍼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특히 정성룡에 비해 빌드업이 부족하다는 평은 받지만 현재 신인 조현우는 경험과 킥 능력이 더욱 안 좋아서 김승규가 주전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선방능력이 다소 감소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아직도 압도적인 선방능력과 반사신경은 김승규의 최고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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