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엔트리 부상 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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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스포츠에서 마지막 엔트리에서 탈락할 경우 몇몇 언론들은 '낙마(落馬)했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낙마. 말을 타는 사람이라면 가장 많이 겪는 사고이자 상당히 중상 내지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사고다. 때문에 역사서에 보면 중장갑을 입은 장수라도 말을 쏘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슈퍼맨 역으로 유명했던 크리스토퍼 리브가 낙마로 인해 전신마비가 왔었고, 홍콩 배우 유덕화도 낙마 사고로 중상을 입기도 했다. 역시 대회 명단에서 탈락할 경우 마음의 상처 역시 낙마 사고처럼 선수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하물며 매년 돌아오는 시즌이 아닌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의 경우 선수생활이 길지 않은 운동선수들에게는 길어봤자 3~4번의 기회가 주어지며, 게다가 국가대표라는 얻기 힘든 명예가 한 순간에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권창훈이 20일 최종전인 앙제 전에서 부상을 당해 부축을 받으며 퇴장하고 있다. (사진=중앙일보)

 

최근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팀의 심정이 낙마와 같을까. 수비수 유망주 김민재가 오른쪽 비골에 실금이 가는 부상을 시작으로, 최종전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 권창훈, 갈비뼈 부상을 당한 염기훈, 무릎 인대가 파열된 이근호까지 줄줄이 중심에 서 있어야 할 선수들이 부상으로 낙마했다. 이에 오늘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불운한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엔트리에서 낙마했던 지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황선홍

 

1988년 이회택 감독은 아시안컵을 앞두고 건국대학교의 무명 선수인 황선홍은 발탁한다. 당시 엄청난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이회택 감독은 황선홍을 공격수로 기용했으며 데뷔전인 한일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이 기세를 이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같은 대학생인 고려대학교 홍명보와 함께 염원인 16강을 이끌 새로운 피로 주목되지만 결과는 3패였으며 공격수인 김주성과 황선홍은 비난을 받게 된다. 이은 1994년 미국 월드컵 역시 스페인전과 볼리비아전에서 무득점에 그치며 결국 16강을 이루어내지 못한채 많은 질타를 받는다.

 

94년 미국월드컵 독일전에서 골을 넣어도 황선홍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세레모니도 뭔가를 향해 화를 내는 모습에 가까웠다. 후에 예능 '무릎팍도사'에 나와 말하길 "왜 이제서야 들어가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진=MBC)

 

당시의 질타는 황선홍에게 어마어마한 트라우마를 안겨다 줬고, 같은 동료인 홍명보의 말에 의하면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깨기가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부터 그의 득점력은 절정에 달했다. 게다가 월드컵에서는 역적일 지언정 숙명의 한일전에서는 4경기에서 5골을 넣었으며 4경기 모두 결승골을 넣을 정도로 한일전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을 불태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다가왔다. 당시 최용수-황선홍의 투톱은 당시 피파랭킹 3위 체코를 맞아 각각 1골씩 넣어 2대2를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당시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은 현재 대표팀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선수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마지막 프랑스로 떠나기전 중국과의 친선전.

 

사실 당시에는 약체로 여겼던 중국과의 경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만큼 축구협회는 무능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경기 와중에 황선홍에게 골 찬스가 났고 황선홍은 주저 없이 대쉬하는 와중에 몸이 붕 떠올랐다. 당시의 중국 대표팀의 승부욕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정도였다. 당시 인대 끊기는 소리가 경기장에 들렸을 정도라고 했고 TV화면 너머로 보는 국민들까지도 엄청난 부상인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황선홍의 무릎 인대는 그야말로 '아작이 났다.'

 

중국과의 최종평가전에서 황선홍은 이 태클로 인해 무릎 인대가 나간다. 당시 진통제를 여섯 번이나 맞았지만 경기에는 한 차례도 나올 수 없었다. (사진=스포츠서울)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22인의 엔트리에 황선홍은 발탁되었다. 단 한경기라도 뛰어보고자 진통제를 여섯 번이나 맞았다. 그러나 그런걸로 해결될 부상이 아니었다. 결국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고 연계성이 뛰어난 황선홍 없이 고립된 최용수나 김도훈 만으로는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의 벽을 뜷기는 무리가 있었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황선홍은 도피하듯 J리그로 떠났고 결국 2002년 월드컵에서야 그는 월드컵의 악몽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난 다시 한국에 가야 합니다. 난... 한국 가야 돼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식을 다 바꾸고 은퇴하려고요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 1999년 스포츠 웹진 '후추닷컴' 일본 오사카 인터뷰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고종수

 

대한민국 축구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 고종수.

 

1997년 아시안컵의 악몽을 떨쳐버리고 삼고초려 끝에 축구협회는 차범근 감독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는 첫 번째 평가전인 호주 4개국 대회의 노르웨이전에서 고종수를 바로 주전으로 기용한다. 고종수의 플레이는 이전에 그저 치고 달리며 투박했던 선수들과는 달랐다. 크게 모션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중원을 흔들면서 가끔씩 찔러주는 패스는 상대팀을 서늘하게 했고 특히나 중원에서 날리는 중거리슛은 엄청났다. 결국 다음 뉴질랜드 전에서 그는 골을 기록했고 당시 18세 87일의 최연소 득점에 기록되었다.

 

'앙팡 테리블' 고종수. 엄청난 기량을 가지고도 결국 월드컵과는 운이 없었다. (사진=다이나믹)

 

1998년 월드컵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던 대표팀과 달리 고종수의 미래에는 큰 기대를 가지게 했고 이내 고종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고 능력있는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월드컵인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축구협회는 거스 히딩크 감독을 선임했고 히딩크의 포메이션에서 가장 빛나는 선수는 단연 고종수였다. 하지만 월드컵을 1년 정도 앞둔 2001년 8월 25일 전남과의 경기에서 후반 교체되었다가 7분만에 십자 인대가 파열되었다. 당시 월드컵뿐 아니라 축구 생명도 끝장날 정도의 통보였다. 결국 고종수는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서 낙마했고, 당시 히딩크 감독은 2002년 명단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고종수를 언급할 정도로 아쉬워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이동국

 

1998년 무참히 패배했던 네덜란드 전에서 후반 교체출전한 이동국의 강력한 중거리 슛과 헤딩슛은 그나마 우울했던 국민들에게 작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2000년 초반 이동국의 무릎은 벌써 부상에 멍들어 있었다. 1년사이에 이동국은 국가대표,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 주요 전지훈련, 시범경기, 국제컵대회, 클럽, 올스타전, 아시아챔스, 아프로아시안컵 등등 전 세계를 다니면서 혹사를 했고 결국 골드컵 중간엔 무릎에 붕대를 감고 뛰다가 결국 대회가 끝나자 무릎도 같이 끝난다. 결국 독일에 날아가 그는 재활로 시작을 했다.

 

결국 허정무 감독은 골드컵과 아시안컵의 졸전으로 퇴출되고 거스 히딩크가 한국에 온다. 이에 히딩크는 여러 공격수들을 시험해보면서 이동국은 혹사에서 벗어나지만 결국 팀 엔트리 밸런스와 전방 압박 능력의 시험에서 실패하며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된다. 당시 인터뷰에 의하면 이동국은 매일매일 소주로 하루를 시작했으며 온 나라가 축제에 빠진 2002년 월드컵 내내 축구를 보지 못하고 폐인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2002년 이후 한동안 대표팀에 오르지 못했던 이동국은 상무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하나씩 고치기 시작했고 조 본프레레 감독이 부임하면서 2년만에 대표팀에 재승선한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딕 아드보카트 감독으로 교체되면서도 이동국은 굳건했다. 33경기의 A매치에서 14골 4도움을 터뜨리며 월드컵의 본선으로 이끈 에이스 역할을 했다. 이번엔 틀림없는 승선이었다.

 

국가대표팀뿐 아니라 클럽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보이고 있던 이동국은 무릎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면서 자신의 자리를 조재진에게 넘겨준다. (사진=스포츠조선)

 

그러나 월드컵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 인천과의 경기에 후반 40분에 강하게 무릎을 다치며 실려나간다. 재활과 수술 중을 택하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월드컵에 대한 의지가 있던 이동국은 재활을 택한다. 하지만 무릎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독일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이동국의 무릎 판단은 무릎 십자 인대 완전 파열이었다. 초반 손상이 덜된 것으로 알려진 20%의 부분마저 파열된 것이 독일에서 검사되었기 때문이다. 이동국은 결국 수술을 택했다. 2010년 결국 남아공 월드컵에 8년만에 재입성했지만 이미 대표팀은 그보다 뛰어난 후배들이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곽태휘

 

첫 원정 16강을 안겨다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하지만 당시에도 아쉬운 부상 선수는 존재했다.

 

2008년 전남 드래곤즈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재선임되면서 같은 팀에 있었던 곽태휘를 발탁했다. 그리고는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월드컵 3차 예선에서 헤딩 선제골을 넣고, 2008년 동아시안컵 중국전에서 추가시간 역전골을 넣으며 안정된 수비력과 더불어 필요한 상황때 세트 피스에서 골을 넣는 능력까지 탁월한 경기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잦은 부상은 결국 발목을 잡았다. 성공적인 국가대표 데뷔 후 리그 경기 도중 왼쪽 발목 인대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을 날렸고, 2008년 다시 복귀하여 국가대표에 승선한 뒤 헤딩골을 기록했지만 또 오른 무릎 전방 십대인대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피지컬과 세트 피스시 능력을 허정무 감독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본선 직전 열린 마지막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왼 무릎 내측인대 부분파열로 결국 곽태휘는 고국에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평가전인 벨라루스전에서 무릎 인대 파열로 귀국해야 했던 곽태휘. 좋은 성적을 냈던 2010년 월드컵이었지만 그가 있었다면 더 높은 성적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진=재경일보)

 

결과적으로 2010년 월드컵은 기록은 좋았지만 당시 2002년 월드컵의 탄탄한 수비수의 주역들이 모두 노쇠하면서 다음 월드컵까지 그 수비력은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2006년에는 은퇴했던 최진철을 다시 복귀시킬 정도로 수비력은 불안했다. 이에 2010년 대안으로 떠올랐던 곽태휘는 큰 기대를 얻게 했으나 결국 낙마해 더욱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결국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복귀했지만 홍정호-김영권에게 자리를 뺏기면서 큰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김진수

 

U-17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으며 8강 진출을 이끌었던 김진수는 경희대학교로 진학했다가 J리그 아비렉스 니기타에 스카웃 되어 데뷔했다. 수비력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보이지만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롱스로인은 선배 현영민을 떠올리게 했고, 센스있는 오버래핑과 저돌적인 드리블은 2010년 이후 아쉬웠던 이영표의 공백을 충분히 메워줄 수 있는 기대감을 올리기에 충분했다. 경쟁자였던 윤석영과 박주호를 여유있게 따돌리며 주전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엔트로 발표 이틀 전 소속팀에서 입은 부상의 회복속도는 더뎠고 결국 출국 직전 낙마했다. 결국 박주호가 그 뒤를 이어 출전했다.

 

J리그의 기량으로 독일까지 진출했던 김진수지만 결국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했다. 김진수는 이번 월드컵 역시 부상이 변수다. (사진=더팩트)

 

이번에도 비교적 포백에서 경기력이 좋았던 신태용 호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지목되었으나 결국 평가전에서 입은 부상은 회복이 더딘 상황이고 일단은 엔트리에 올라 회복세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100퍼센트 기량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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