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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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대한민국 대표팀 등번호사 : 10번

 

사실 펠레의 10번은 우연이었다. 당시에는 알파벳 순으로 번호를 배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그러다보니 우연히 펠레는 10번을 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10번을 단 펠레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월드컵에서 10대의 나이로 팀에게 우승컵을 안겼다. 이후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10번을 달면서 '10번=팀 에이스'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명한 만화 캡틴 츠바사의 주인공을 비롯한 일본 축구 만화의 주인공들도 대부분 10번을 달았고, 유벤투스에서도 10번을 단다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하지만 현대축구에서 9번, 7번을 단 슈퍼스타들이 늘어나면서 10번은 에이스의 번호보다는 중앙 미드필더진에서 때로는 돌파를 이용한 강력한 공격수로 때로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공간 패스로 공격을 조율해나가는 팀의 핵심 공격자원의 번호로 인식된다. 때문에 국가대표에서 이렇다 할 플레이메이커를 가지지 못한 대한민국은 '10번의 계승'이라는 의미는 조금 애매모호하다. 기껏해야 윤정환, 고종수가 있을 2002년을 기대해보았지만 당시 히딩크 감독은 플레이 메이커를 통한 패스축구를 추구하지 않았기에 10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대표팀의 10번은 누가 계승해 왔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성낙윤 (육군 병참단 축구단)

 

서울 태생으로 1948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김용식 감독의 스카우트로 조선전업에 입단하여 공격수로 활약한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며 군에 입대했고, 1960년 은퇴할때까지 육군 병참단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 코치로 전업하는 타 선수들과는 다르게 성낙윤은 심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항의를 해도 절대 한 번 내린 판정에 번복이 없어 별명이 '도깨비'라고 불리기도 했다. 1965년에는 FIFA 국제심판으로도 부임해 1970년 대한축구협회 산하 심판위원회를 구성, 조악한 축구심판의 권익 향상에도 기여하였다. 1980년까지 심판으로 활약하다 1981년부터 육군 축구단 '충의'팀 감독을 맡았으나 킹스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지자 사임을 했고, 그 후로 축구원로로 활동을 하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박창선 (대우 로얄즈)

 

 

앞서 말했던 10번의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역대 10번이라면 단연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캡틴 박창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플레이메이커 스타일에 특화된 선수로 자유롭게 공격진영에서 포지션을 스위칭하며 찬스가 날때마다 날카로운 슈팅을 노렸다. 결국 이러한 플레이가 월드컵 본선 아르헨티나 전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고 멋진 중거리 슛으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본선 무대 첫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3골을 이미 실점해 패색이 짙어진 대한민국이었으나 첫 골의 기쁨과 간절한 기도 세레모니는 세계 축구 팬들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월드컵 이후 1986년 7월 27일 미국 LA에서 펼쳐진 월드컵 올스타 자선행사 경기에 기타지역(유럽,아시아,아프리카) 대표로 박창선이 뽑히기도 했다.[각주:1]

 

뿐만 아니라 뛰어난 자기 관리로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장의 자리를 잘 수행했으며, 당시 32살이면 선수의 종반을 달릴 나이에 풀타임으로 출장하며 이적한 대우 로얄즈의 첫 리그 우승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후에 지도자로도 모교 경희대학교 사령탑에 오르며 경희대학교 전성기를 이끌었고, 이후 김은중, 이동국 투톱을 중심으로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거둔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상윤 (일화 천마)

 

 

그 동안 대한민국 측면의 스킬이라는 것은 한번 멀리 툭 치고 자신의 주력을 이용해서 상대편을 뒤로 떨어트린 후 센터링을 노린다거나, 오프 더 볼 찬스에서 역시 빠른 주력과 신체능력을 이용해서 먼저 공을 선점해 측면으로 그저 내달리는 저돌적인 플레이어가 많았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다음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10번을 이어받은 고정운이다.

 

하지만 이상윤은 빠른 발과 더불어 당시엔 희귀한 기교파 테크니션이었다. 지금의 이영표의 헛다리 짚기를 국내에서 최초로 선보였던 축구선수며 상대를 등졌다가 턴을 해서 빠져나오는 스킬, 그리고 페인트모션으로 접는 동작이 유난히 많아 별명도 그의 스킬에서 비롯된 '팽이'였다. 피지컬이 178cm에 64kg의 약한 피지컬에서도 저돌적인 클래식 윙어를 제치고 국가대표에 승선할만큼 화려한 멤버였다.

 

이에 1990년 노르웨이전을 통해 대표팀에 데뷔하였고, A매치 데뷔전에서 곧바로 데뷔 골을 기록했다. 당시 같이 데뷔했던 선수가 고려대학교의 홍명보, 그리고 먼저 데뷔했던 건국대학교의 황선홍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세대교체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홍명보, 황선홍과는 달리 벤치에 앉아 본선 경기에서는 뛰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고정운 (일화 천마)

 

 

건국대학교 졸업 후 곧바로 1989년 일화 천마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부터 바로 주전자리를 꿰차며 대학교 재학기간 내내 연습한 크로스가 어마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4골 8도움으로 신인왕에 올랐다. 지금도 크로스에 관련해서는 대한민국 역대 대표팀의 탑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왼쪽 측면에서 저돌적으로 뛰어가는 모습에서 그의 별명인 '적토마'가 생겨났다.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데뷔했지만 결국 대표팀 본선 엔트리 승선에는 실패했고 이에 고정운은 보란듯이 다음해 13골 7도움을 기록했다.

 

결국 김호 감독의 신의를 얻고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부터 특유의 저돌적인 돌파로 좋은 모습을 보인다. 이에 본선 엔트리에서도 에이스의 번호인 10번을 받게 된다. 조별리그 세 경기에서 전경기 풀 타임을 출전했으며, 그저 내달려서 센터링에 집중하던 기존의 모습과는 달리 전진 돌파력 및 전술적인 움직임에서도 크게 향상된 모습으로 스페인 전에서 핵심 수비수 미겔 앙헬 나달의 퇴장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등, 골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당시 월드컵이 끝나고 홍명보와 함께 해외진출이 유력한 멤버로 뽑히기도 했지만, 당시 구단이 허락하지 않으면 전혀 이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에 몇몇 유럽팀이 이적을 시도하다가 돌아간 정황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폼이 떨어졌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마에 씌였다고 할 만치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 '도쿄 대첩'이라 불리는 한일전 당시 역주행을 하다 골을 뺏기고 야마구치 모토히로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후 국가대표에서 급격한 내리막길을 탔고, 결국 본선 최종 엔트리에도 빠지게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용수 (상무)

 

 

사실 최용수는 아마추어 시절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피지컬 축구를 원하던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감독의 특성에 따라 연세대학교 4학년때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득점을 떠나 뛰어난 움직임으로 윤정환과 함께 올림픽대표팀의 중심선수로 맹활약했다.

 

역시 같은 피지컬 축구를 하는 차범근 감독 역시 최용수를 시험삼아 코리아컵에 가동해보며 주전 자리로의 가능성을 점쳤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홍콩 전 해트트릭을 시작으로 카자흐스탄 전 4골, 우즈베키스탄 전 3골, 일본전 2도움으로 예선 7골2도움을 기록하며 국가대표 최용수로의 최고의 폼을 보여준다. 그 후로도 이어진 예선전에서 확실한 대표팀의 공격수로 자리를 잡았으며, 게다가 유기적인 황선홍과의 조합은 더할나위 없이 최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월드컵 직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은 불의의 부상으로 사실상 본선 경기 출장이 어려워졌고, 투톱이 아닌 원톱을 생각했던 차범근은 좀 더 데드볼 상황에서 다양한 득점을 할 수 있는 김도훈을 멕시코 전 원톱으로 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고, 결국 네덜란드, 벨기에 전에서 출장 기회를 얻었으나 좋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늘 선호했던 등번호는 10번이었다. 소속팀, 국가대표팀에서 큰 일이 없으면 10번을 달고 뛰었다. 다만 후에 이영표로 인해 다음 월드컵에서 11번을 달았고, 이후로 11번을 다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이영표 (안양 LG 치타스)

 

 

13년간 대한민국의 측면을 책임진 레프트백. 전방의 박지성과 후방의 이영표가 버티는 대한민국의 왼쪽은 한 동안 걱정할 일이 없을만큼 기복없이 안정되고 수준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래 크게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허카우터'라는 별명이 있는 허정무 감독에게 선발되었다. 당시 그렇게 선발된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이영표는 2002년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된다. 그때 우측 윙백 박진섭과 함께 '좌영표, 우진섭'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2002년 월드컵에서도 측면 미드필더 송종국과 함께 '좌영표, 우종국' 이라는 말은 유효했다.

 

히딩크의 지옥과도 같은 피지컬 훈련을 통과하며 대표팀의 고정 왼쪽 미드필더로 승선했다. 이때 이영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에서 10번을 배번받는다. 수비에서 공격을 번갈아가는 수비형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나설 상황이었지만 경기 훈련 도중 차두리와의 몸싸움에서 부상을 입어 폴란드와 미국 전에서 이영표를 대신해 이을용이 왼쪽 미드필더로 나섰다. 하지만 3차전부터 송종국과 함께 루이스 피구를 완벽하게 봉쇄하며 대회 가장 멋진 박지성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이은 16강전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천금과 같은 골든골을 어시스트하며, 2002년 월드컵에서 가장 중요한 두 골을 어시스트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박주영 (FC 서울)

 

 

2002년 4강 신화가 끝나고 대한민국에는 최고의 축구붐이 불었다. 딱 하나 걱정되었던건 정통 공격수인 황선홍과 최용수의 작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안정환이 있었지만 원톱이라고 보기에 안정환의 포지션은 애매한 뉘앙스가 있다. 그때 2003년 U-20 월드컵에서 슈퍼스타가 나타났다. 감각적인 슈팅 화려한 개인기에 '원샷원킬'의 골 결정력 2살을 월반한 실력을 가진 박주영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음해에 열린 2004년 U-19 대회에서 일본의 히라야마 소타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을 상대로 1골 1도움을 기록했고, 다음번 중국을 만나 수비수를 3~4명을 개인기로만 제치며 골을 기록한 모습은 지금도 회자될만큼 박주영이라는 이름을 알린 골이었다.

 

그렇게 화제를 불러일으키자 본프레레 감독을 향해 박주영을 뽑으라는 언론의 압박이 거세졌고, 결국 2005년 아시아 지역예선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데뷔전을 터트려 패배 직전 기사회생하는 동점골을 터트려 극적으로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다. 이때의 활약으로 꾸준히 선발 기회를 얻었고 쿠웨이트전 결승골, 그리스, 핀란드 평가전에서도 골을 기록했다. 이후 아드보카트호로 재편된 국가대표팀에서도 박주영은 우선적으로 뽑혔다.

 

하지만 마지막 스위스전에 출전에 스위스의 수비수들에게 피지컬 적으로 완전히 밀리며 아시아용이었다는 비난을 금치 못한다. 뿐만 아니라 괜한 수비가담으로 인한 필요하지 않았던 파울로 프리킥을 제공했고, 그 프리킥을 데드볼 마스터 하칸 야킨이 차 필리페 센데로스의 첫 골을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박주영은 눈에 보이는 개인기가 아니라 유럽에 확실히 먹힐 피지컬이 필요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박주영 (AS 모나코 FC)

 

 

앞선 월드컵의 부진으로 리그에서도 크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다, 2008년 모나코로 진출하면서 유럽에서 확실히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시당초 허정무 감독은 최종예선 내내 박주영과 이근호를 기용했기 때문에 본선 엔트리에 등록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출전한 조별예선 1차전 그리스전에서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지난 월드컵에서 피지컬에 밀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상황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장신 수비수들과의 공중볼 포스트에서도 좋은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해 상대 수비수들을 몰고 다니며 빈 공간을 만들어 2선 공격수에게 좋은 찬스를 제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그리스전 피파 공식 MVP는 박지성이었지만, ESPN에서 지정한 MOM은 박주영이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전에서 자신의 정강이를 맞고 들어가는 바람에 월드컵 역사상 두 번째 자책골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박주영이 나온 초등학교에서는 자살골을 넣자 국가대표 현수막을 내렸다가, 다음 경기에서 골을 넣자 다시 내건 일이 있었다.

 

그리고 3차전 나이지리아 전에서 월드컵 데뷔골이자 프리킥 역전 골을 기록하며 16강 진출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진출한 16강 우루과이 전에서 결국 무득점에 그쳐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골을 제외한 대부분의 움직임에서 매우 좋은 능력을 보였고, 각종 외신 및 해외 언론에서도 박주영에게 한국 최고의 평점을 주기도 했다. 박주영은 이번 대회에서도 완벽한 스트라이커라는 평을 듣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유럽에서 키워온 피지컬과 센스, 그리고 기존의 붙박이 원톱과는 다른 유기적인 스트라이커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박주영 (왓포드)

 

 

그러나 4년뒤의 박주영은 달라져 있었다. 박주영은 이적한 아스날에서 오래동안 실전을 뛰지 못하면서 경기력은 엄청나게 떨어졌고 이에 홍명보도 처음엔 박주영을 뽑지 않았다. 하지만 동아시안컵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평가전에서 빈약한 득점력을 보여주었고 김신욱과 이근호의 콤비가 크게 좋지 않자 많은 여론들은 '그래도 박주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반 '소속팀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는 차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던 홍명보와 이에 컨디션이 100%일때 합류하겠다는 박주영에 국대 차출은 좀 더 보류되었다.

 

그리고 1년여만에 그리스와의 친선경기에 명단을 올렸고 사실상 마지막 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에서 박주영은 전반 18분 논스톱 슛으로 2년만에 득점에 성공했고, 어시스트와 패스 능력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며 박주영의 비난 여론과 더불어 엄청난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의 대체 공격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표팀의 승선이 결정되었으며 박주영 또한 피지컬 코치인 이케다 세이고 코치와 1:1 훈련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전에서 경기 초반 이청용의 좋은 패스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해 '박따봉'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받았고, 결국 후반 교체된 이근호가 선제골을 터트리게 된다. 알제리 전도 마찬가지로 크게 눈에 띄지 못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다 교체로 들어온 김신욱의 공중볼 처리로 인해 두 번째 골을 터트리자 또 다시 무능하다는 비난 여론을 받게 된다. 결국 대회 동안 슈팅 0개, 피(披)파울도 0개를 보여주면서 적극성마저 0에 가까웠다는 비난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정성룡 골키퍼와 더불어 월드컵이 끝난 뒤 가루가 되도록 까인 선수 중에 하나가 되었다. 외신 역시 '재앙같은 경기력'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승우 (엘라스 베로나)

 

 

권창훈이 승선을 앞두고 부상으로 월드컵 진출이 불투명해지자 신태용 감독은 2018 러시아 월드컵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28인 명단에 이승우를 포함시켰다. 당시 16강에 오른 U20 대표팀에서 신태용 감독이 직접 보고 기용했던 이승우이기에 분명히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득점과는 관련없이 이승우의 움직임이 상대방을 교란시키기에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승우를 본선 엔트리에 승선시켰다.

 

그 후 온두라스 전에서 좋은 센스를 보여주며 손흥민의 골을 만드는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코치진은 그런 이승우에게 등번호 10번을 배정해주었다. 당시 자신의 의도가 아닌 코치진의 결정이었는데, 11번을 달던 이근호 선수도 부상으로 제외되자 10번을 달았던 황희찬의 번호를 이승우에게 준 것이다. 10번의 무게감을 알고 있었는지 가장 졸전으로 평가되던 볼리비아 전에서 역습을 막기 위해 몸을 날리던 장면은 국민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가 되었으며, 그 후 본선에서 스웨덴, 멕시코 전에서 후반 교체로 첫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아쉽게도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이라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엔 무리가 있었으며 또한 앞서 실시된 파워프로그램 중 '셔틀런'에서 꼴지를 했다는 기사를 보아 아직 피지컬면에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는 보여진다.

 

하지만 역대 최연소 데뷔 4위에 기록될만큼 이승우는 아직 어리고, 국가대표팀에 맞는 실력와 입지를 다질 시간은 아직 무한히 많다. 충분히 현재 유럽 리그에서 많은 연습을 통해 주전자리를 꿰찰 수 있다면 다음 월드컵에서는 정말 진정한 10번의 주인공을 자신의 의지로 가져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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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기는 아메리카 올스타 대 기타지역 올스타로 치뤄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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