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투수 고토 미츠타카
- 황색스포츠/야구
- 2018. 4. 21.
"야구에 만약은 없고 혹시라도 만약이 있다면 다 우승한다."는 정수근의 유명한 발언이 있다. 여타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스포츠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고 승자와 대적한 쪽의 이름 정도는 남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성공하지 못하거나 그저 잊혀진 채 관련업계에 남거나 영영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전혀 주목받지 못한 선수가 갑자기 주목받기도 하고, 여러가지 의미로 이야깃거리나 관심을 받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선수가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라거나 예전에 엄청난 유망주였다거나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고 그런 스토리 위에 생겨나는게 이야기라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불운의 투수 고토 미츠타카(後藤光貴) (사진=구글)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에 고토 미츠타카(後藤光貴)라는 투수가 있었다.
라쿠텐에서 현재까지 뛰고 있는 타자 고토 미츠타카(後藤光尊)와는 다른 한자를 쓰고 다른 포지션에 다른 팀에서 선수생활을 보낸 전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수다. 이 선수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으며, 그만큼 선수로는 그다지 빛나지 못했던 그의 처절한 야구인생을 건조하게 대충 적어보기로 한다.
고교시절
후쿠이 현 출신으로 사이바 고교의 포수였던 고토 미츠타카는 고등학교 2학년 무렵 후쿠이 현 대회에서 우승한 기세로 호쿠신에츠 지역 대회에 출전했지만 이시카와 현의 강자 세이료 고등학교의 거물 신인타자에게 홈런을 맞고 패배해 고시엔(甲子園)의 꿈이 좌절된다. 그 거물 신인타자의 이름은 마쓰이 히데키(松井秀喜).
초 고교급 선수 마쓰이 히데키 앞에 고토 미츠타카는 고배를 마신다. (사진=구글)
사회인야구 시절
1992년
사카이 신일본제철에 입사했고 포수에서 유격수로 전향한다.
1994년
주전 레귤러 멤버의 목표를 이뤘지만 사카이 신일본제철 팀이 사회인 야구에서도 실적이 없자 폐부를 발표한다. 팀 실적이 없는지라 회사의 다른 팀으로도 이적할 수가 없어 난감하던 차에 신일본제철 야구팀감독이 친분이 있던 다이와은행에 간절히 부탁해 다이와은행 팀으로 이적하게 된다. 다이와은행 팀으로 이적한 고토 미츠다카는 팀에 투수가 모자란 판국에 포수 출신이자 어깨가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 1997년 투수로 전향한다.
1998년
수 많은 팀들을 제치고 사회인야구 일본 선수권에 출전하게 되지만 2회전에서 탈락했고, 고교시절부터 꿈꿔왔던 프로 드래프트에 출전했지만, 세이부의 실수로 지명이 무산되고 그 충격에 오랜 기간 동안 울적해있었다고 한다.
1999년
3월 다이와은행도 사회인 야구팀의 폐부를 발표하고, 설상가상으로 5월 경기도중 라이너로 맞은 안타가 안면을 강타해 코뼈와 왼쪽 눈 근처 부위가 골절당하면서 실명의 위기가 찾아온다. 치료를 위한 공백기 이후 복귀했으나 부진한 나머지 다이와 은행은 도시대항 본선에 나가지 못한다. 폐부 후 쓸쓸히 일본생명의 보강 선수로 뽑혀 그저 선수생활을 연명하고만 있었을 무렵 고토는 프로 드래프트 1회에 세이부에게 7순위로 지명되면서 결국 꿈을 이룬다.
두 번의 야구팀 폐부, 라이너성 타구에 얼굴골절까지 당하는 와중에 1999년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팀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사진=구글)
프로야구 시절
2000년
전 해 나이 26살의 늦깎이 신인 투수로 세이부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입단한 고토는 그 해 6월 25일 등판해 2와 1/3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데뷔한다. 하지만 7순위 유망주였던지라 팜에서 그렇게까지 큰 기회도 주어지지지 않았고, 10월 13일 다시 오릭스전에 선발등판하며 7회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불펜이 약했던 세이부의 팀컬러 답게 패전처리용 투수가 된다. 이는 후술할 여러가지 불운의 일부에 불과했다.
2001년
1군에 정착한 고토는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면서도 좀처럼 승수를 쌓지 못했으나, 오랜 기다림 끝에 7월 27일이 되어서야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연장 10회초에서 여섯 번째 투수로 등판해 1/3이닝을 공 하나로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다음 이닝에 세이부가 점수를 획득하며 대망의 프로 첫 승을 올렸다. 공 1개만으로 첫 승을 거둔 승리투수가 된 것은 같은 해 롯데 마린스의 야마자키 타카히로가 달성한 이후 다시 나온 진기록이었다. 같은 해 9월에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해 선발 첫 승리를 이뤄낸다.
최종 성적은 선발로 6회, 계투로 35회 등판하여 83이닝 동안 삼진 97개, 2점대 방어율을 기록해 슬슬 포텐셜을 보여주었던 고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승 2패의 성적밖에 거두지 못한 이유는 점점 바닥을 보여가던 세이부의 불펜진에 이유가 있었다.
2002년
2002년 역시 7승 2패, 방어율 3.38의 호성적을 올리고 자신의 프로 첫 완투, 완봉승까지 기록한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 킨테츠를 제치고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일본시리즈에서 1차전 중간계투로 등판해 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5차전 선발로 내장된 고토는 팀이 요미우리에게 내리 4연패를 당하면서 그때의 2이닝이 자신의 일본시리즈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 기록이 된다.
자신의 첫 일본시리즈에서 중간계투로 호투를 펼쳤으나 요미우리에게 내리 4연패를 당하며 선발의 기회를 잃는다. 하지만 3년뒤 카와하라 준이치와 맞트레이드 되며 거인군단의 일원이 된다. (사진=구글)
2003년
부상 투수 투성이가 된 선발진에서 10승의 호성적을 올리며 드디어 포텐이 만개한 고토는 커리어 최초 규정이닝을 달성한다. 하지만 리그 최다 피홈런인 29홈런을 기록하며 구위하락의 증세를 보인다. 어느덧 고토는 30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2004년
작년 후반기 부진과 우측 어깨부상의 영향으로 6경기에 등판에 6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부진한다. 소속팀인 세이부가 우승하고 이토 츠토무 감독의 지도력이 빛을 발해 장장 12년만에 주니치를 꺾고 팀이 2000년대 새로운 황금시대를 완성해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부상에 허덕이며 일본시리즈 엔트리에 등록조차 되지 못한다.
2005년
고토는 요미우리의 카와하라 준이치(河原純一)와 맞트레이드가 되며 거인군단의 일원이 된다. 이적 후 첫 등판은 잘 막아내다 6회에 내리 5실점을 주며 부진했고, 그 막강하던 거인 타선은 네개의 안타밖에 뽑지 못하는 부진을 겪으며 선발로 세 번을 등판하는 동안 호투중에도 타선이 터지지 않고 분식회계를 당하는 등 고전하다 2군행 이후 결국 10월 24일 전력 외 통보를 받는다. 갈 곳이 없어진 고토 미츠다카는 결국 그 해 10월 28일 현금트레이드로 친정팀 세이부에 다시 복귀한다.
2006년
절치부심 끝에 재기를 노렸으나 시범경기에서 부진했던 여파로 2군에서부터 시작했지만 결국 1군에 복귀하지 못한 채로 시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는다. 현역생활을 결국 마감한 고토는 은퇴 후 세이부 라이온즈의 관서 지구 스카우트에 취임했다. 발굴해 낸 선수로는 리드오프 가네코 유우지(金子侑司)나, 현 세이부 중심타자 중 하나인 아사무라 히데토(浅村栄斗) 등이 있다.
그가 발굴한 선수 중 아사무라 히데토는 지금도 세이부의 중심타자다. (사진=구글)
'그저 이런 선수도 있었다.' 정도의 선수지만 이 선수의 진면목은 은퇴 후에 나타났다.
그의 인생스토리는 '역대 최강의 불운투수'라는 이름으로 희화화가 되었고 일본의 야구팬들이 모인 2ch같은 마토메 사이트에서 이야기거리가 되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세이부에 있던 동안 수많았던 그의 불운은 그가 야구인생 내내 몸담아온 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불안함의 전조였고 커리어 내내 그 여파를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가장 상위권 팀 이미지가 강하던 퍼시픽 리그의 전통강호 세이부 라이온즈였지만 선발, 타선 강팀이라는 이미지에 비해 전통적으로 불펜은 약했다. 늦깎이 신인투수였다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 충분히 호투했던 고토 미츠타카의 성적은 잘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ND로 승을 날리거나 패전을 당하며 번번이 시원찮았고, 호성적을 올리며 단기전에 투입될만한 시점엔 풀타임 선발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펜 등판을 했다. 1
괴동(傀童) 마쓰자카 다이스케 (사진=구글)
물론 세이부엔 메이저리그에서도 탐내던 괴동(傀童)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가 이닝이터 완투형 선발로 존재했지만 마쓰자카 역시 2001년에는 사와무라상을 타긴 했어도 15패를 했으며 2002년에는 부상으로 주춤했다. 이 역시 장기적으로는 완투형 선발투수 괴동이라는 일본야구 최고의 투수로 포장된 마쓰자카를 메이저리그에서 5이닝 넘어가면 무조건 불펜야구를 해야하는 투수로 만들었고, 시도 때도 없는 볼넷으로 보스턴 입단 첫해 이후의 마쓰자카를 '육수자카'로 만들어버렸다. 첫 해 반짝한 마쓰자카는 6년간 117경기에 등판해 50승 37패에 방어율 4.52의 지극히 평범한 성적을 냈다.
연평균 900만 달러를 받아간 6년 5200만 달러의 계약과 포스팅 비용인 5111만 1111달러를 비롯해, 거의 1억 달러를 넘게 쓴 지출은 화룡점정을 찍었고 일본야구로 복귀하고 나서는 완벽한 '먹튀'로 변신했다.
마쓰자카, 고토 이외의 다른 선발투수는 일본시리즈 MVP로 이름난 이시이 타카시(石井貴)지만 2002년까지 풀타임 선발이던 이시이 역시 2004년 즈음에는 부진과 부상으로 인해 선발에서 불펜으로 전향했고 막상 우승 때 정규시즌 성적은 1승 5패에 4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또 다른 프랜차이즈 투수인 니시구치 역시 2015년까지 롱런했지만 막상 2005년이 회광반조(回光返照)였고 특히 일본시리즈에 5회나 출전해 등판을 7번이나 했으나 0승 5패의 부끄러운 기록만 남겼다.
이닝이터 마쓰자카가 MLB 진출 후 '육수자카'가 된건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사진=스포티비뉴스)
그런 와중에도 불펜진은 평균 이상이었지만 점점 노쇠화를 보이던 마무리 도요타 키요시를 제외하면 2003년까지 영점이 잡히지 않아 헤매던 호시노 토모키, 후에 빛을 발하지만 2003년 데뷔초에 프로 첫 등판 후 1이닝에 9연속 볼이라는 진기록을 기록한 경악스러운 루키시절의 오노데라 치카라, 영점이 잡혔다 말았다를 반복하며 2002, 2003년 짧은 전성기를 맞았지만 막상 중요한 2004년엔 크게 도움이 안된 모리 신지, 오오누마 코지 등등 마쓰자카가 보스턴으로가고 나서는 아예 롱런할 선발조차 사라져 약해진 선발진에 기존의 불펜들의 화염쇼가 이어지고 계속 우승권에 가까우면서도 항상 한 끗이 모자랐다.
팬들은 중요한 순간이 되면 볼질에, 불만 지르는 중간계투의 모습을 '오레타치' (俺達. 우리들)로 희화화하게 되었으며 그 '우리들'이 화염쇼로 승리를 날려버리거나 타선이 전혀 터져주지 않는 선수를 불운투수 중의 불운투수라는 고토 미츠타카의 '친구'라는 의미로 아예 가장 불운한 투수에게 비공식적으로 '최우수친구상'을 수상하는 게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고토 미츠타카라는 '반짝'하고 사라진 투수의 불운은 더 이상 막연한 과거의 웃음거리가 아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조짐을 보여준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안 좋은 상황에 처하면 '조짐'이라는 게 있고, 드물지만 갑자기 일어나는 문제를 제하고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그 조짐은 이미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당장 팀의 암흑기나 투수진도 타선도 다 개판인 경우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아닐 것이다. 최소한 그만큼 야구를 보고 어느 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결과물과 성적, 부진과 흥망성쇠는 어느 정도 조짐과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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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Decision: 무판정(無判定) 경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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