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암흑기의 추억 ④ : D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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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미의 2002년

 

백인천이라는 인물은 지금도 워낙 유명하지만 당시의 백인천은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입지에 있었다.

 

LG 트윈스의 첫 우승감독이었던 것과 더불어, 우용득이 "타자" 이승엽으로 전환시켜 발굴했던 감독이라면, 믿어지지 않겠지만 백인천은 타자 이승엽을 키워냈다는 업적이 있던 명장이었다. 그렇게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후 타격 인스트럭터로 대학야구판과 프로구단들을 떠돌아다니던 그 백인천을 5년만에 다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감독으로 발탁한 것이다. 앞서 말한 삼성 시절 팀을 리빌딩해놓은 성과도 있었고 MBC 청룡부터 LG, 삼성 시절 구세주로 칭송받던 그는 롯데에 와서 마왕(魔王)이 되었다.

 

당시의 백인천은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입지에 있었다. (사진=라이트슛)

 

백인천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일찌감치 시즌 포기를 선언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발표했고, 의외로 이 발언은 크게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의 롯데 자이언츠는 포스트시즌이고 뭐고 보이는 게 없는 상황에다 백인천 감독 부임 직전까지 무려 15연패를 기록했다. 기존의 베테랑들은 부진한 선수가 많았고 확실히 신인선수들이 많이 발굴되어 1군 무대를 밟은 건 사실이다. 그리고 왕년의 명장이라고 칭송받던 백인천이기에 모두 백인천 특유의 '신인양성쇼'에서 활약하는 신인들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롯데는 최하위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버티던 용병 호세 에레라까지 7월말 경추부 디스크 증상으로 한달간 결장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고 내친 김에 구단에 의해 퇴출당한다. 그리고 망조(亡兆)의 서막 이후 본편이 시작되었다.

 

당장 백인천 감독이 작년까지 타격 인스트럭터로 있던 팀은 SK였던지라 자연스럽게 SK와 먼저 접촉하기 시작했다. 인스트럭터를 하면서 봐둔 선수들을 내오려고 했던 의도였던 것 같은데, 첫 희생양은 그럭저럭 잘 던지고 있던 투수용병 대니얼 매기와 그나마 당시 팀에서 유일하게 홈런과 타점을 뽑아주던 중심타자 조경환이었고 대가는 당시 일개 유망주에 불과했던 윤재국과 박준서(박남섭)였다. 그 외에 용병투수인 페르난도 에르난데스를 받아와 정확히는 3대2 트레이드였지만 이미 에르난데스는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태였던지라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당시의 트레이드 기사사진. 백인천 감독은 자신과 맞지 않는 선수는 과감히 내쳤다. (사진=국제신문)

 

당장 대니얼 매기를 보내버리고 에레라 이후 대체용병 영입이 없었던 것처럼 백인천 본인이 맘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선수는 '용병없이 간다'는 시대착오적인 슬로건을 내세워 과감히 내쳐버렸다. 대놓고 1순위는 용병, 2순위는 구미에 맞지 않거나 껄끄러운 기존의 선수들이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한때 이름을 날리던 타격 인스트럭터는 감독이 되자 자기의 타격이론과 스윙폼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전혀 맞지 않는 스윙을 억지로 강요당하다가 눈밖에 난 조경환은 허무하게 트레이드 된다. 조경환은 故 김명성 감독이 호세나 마해영 이외에도 롯데 타선의 거포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임창용 킬러로 유명했던 손인호 마저도 벤치에 두고 애지중지해 키우던 선수였다. 그렇게 조경환을 보내고 나서 받아온 박준서와 윤재국은 성장이 정체된 채 1군과 2군사이를 떠돌거나 롯데를 떠나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 신고선수였던 정보명은 역시 감독 마음에 안 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들어 상무 피닉스로 쫓아내다시피 입대시킨다.

 

성적도 안 나오고, 감독도 자기 멋대로 구는데다 팬의 목소리마저도 외면해버린 팀의 후반기는 처참했다. 9월엔 부산광역시와 롯데구단이 합의해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참가국을 응원하는 시민 서포터즈 발대식이 프로야구 붐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사직구장에서 열렸고, 결성식 이후는 무료로 경기를 관람하게 할 계획이었지만 경기 시작과 동시에 514명의 관중을 제한 모두가 나가버렸다. 10월에는 사직에서 열린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유료관중 69명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관중들이 외면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관중들이 외면하는 건 이유가 있다. (사진=국제신문)

 

팀내 최다승 투수는 고군분투하며 8승 14패를 찍은 염종석 정도였고, 불펜은 줄줄이 붕괴해 4점대 이상의 방어율이 기본이었으며 최기문과 김응국을 제하면 2할7푼을 넘긴 타자가 없었다. 주포 박정태마저도 타격폼이 너무 특이해서 스윙폼 개조가 불가능해지자 아예 2군에 쳐박아두기만 하다가 나중에 자기 말을 듣자 1군에 올리기도 했다. 물론 제대로 된 성적이 나올 리가 없었다. 부진했지만 작년 다승왕까지 차지했던 투수 손민한은 당시 한화 포수 채상병과 트레이드를 시도하다 단장에 의해 제지되었다.

 

진정한 마왕이자 독재자가 따로 없었다. 코치들이 있어도 "무조건 내 말 들어" 야구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스태프가 아니라 '전령사'에 불과했다.

 


 

2003년 불협화음

 

시즌 포기를 선언한 백인천 감독은 다음 시즌을 제대로 준비하겠다고 한 만큼 2003년 시범경기까지는 구단과 팬들도 어느 정도 기대를 했으나 여전히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당장 작년 지명한 신인드래프트에서는 박정준, 이인구 정도를 제하면 대부분을 놓쳐버렸고 후에 김이슬이나 김대우 등이 입대했지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 해를 이끌어갈 용병농사는 2002년이 그냥 커피였다면 2003년은 T.O.P였다. 프런트와 감독의 힘싸움은 이어졌고 스카우터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감독이 영입한 일본 사회야구 출신의 용병 투수 모리 가즈마(森一馬)와 멕시코리그 홈런왕 출신인 보이 로드리게스를 데려온다. 하지만 모리 가즈마는 뚜껑도 열기 전에 시범 4경기 등판 9.64의 방어율로 퇴출당하고 보이 로드리게스는 그나마 초반퇴출은 면했으나 7경기 동안 2할도 안되는 타율에 타점도 홈런도 하나 없는 허수아비 이하의 성적으로 퇴출당하면서 롯데 프런트는 대체용병으로 로베르토 페레즈를 영입한다.

 

백인천 감독은 당시 주전포수였던 최기문이 오죽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일본프로야구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주전급 포수라는 코치급 선수 재일교포 김영화(미츠야마 히데카즈)와 히로시마 카프의 2군 경력이 있는 재일교포 이계원까지 실질적으로 4명의 용병선수를 데려왔으나 전원 흔적도 없이 생돈만 허공에 날리게 된다. 시즌 초부터 외인선수 계약문제로 프런트와 감독이 대립한다는 사실과 팀의 분위기를 안 롯데팬들은 연신 한숨을 쉬었지만 한숨의 빈도만큼 구장의 빈자리는 넓어져만 갔다.

 

백인천 감독의 고집으로 데려온 모리 가즈마와 제이 로드리게스. 그 들의 결과는 처참했다. (사진=구글)

 

설상가상으로 감독은 팀의 최고의 타자 유망주인 이대호의 덩치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이어트라는 명목하에 사직 야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리기를 지시했고, 훈련이라는 명목의 고문을 당한 이대호는 그로 인해 무릎 부상을 당하며 시즌 중순까지 거의 출장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릎 부상으로 운동량마저 부족했진 그의 체중은 급격히 불어났다.

 

그래도 팬들은 올해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암흑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놓고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듯한 팀운영은 진행형에 불과했을 뿐... 그렇게, 2003년 시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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