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암흑기의 추억 ⑥: 터널의 끝
- 황색스포츠/야구
- 2018. 4. 6.
2004년 터널의 끝
3년 연속 최하위의 굴욕에 롯데는 투수코치로 이름 높던 양상문을 영입해 팀 리빌딩에 들어간다. 지금의 양상문은 지도자로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코치이자 감독이지만 롯데 코치시절에 미완의 대기였던 박지철과 불펜 에이스 박석진을 에이스로 키워내면서 1999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한 바 있었고, LG 코치시절에도 5점대의 팀방어율을 기록한 LG의 투수진을 3점대 중반의 팀방어율의 팀으로 만든 공로가 있었다. 작년엔 최소한 용병선수들은 어떻게든 잘해주었다는 판단에 재계약으로 방침을 정한 롯데는 더 이상 최하위는 원하지 않는다는 듯 FA시장에도 제대로 돈주머니를 풀어 정수근과 이상목을 데려온다.
롯데 최하위의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는 마운드의 약화, 특히 선발진의 문제였다는 해석이 많았고 타선의 문제는 장타력이나 응집력보다는 그동안 김대익, 김응국, 김주찬으로 돌려막던 전준호의 빈자리가 더 크게 와닿았으리라 생각한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코치진을 물갈이하고 투타 양면을 보강한 롯데는 시즌 내내 덜덜거리던 유격수 자리에는 상당한 유망주로 평가받던 박기혁을, 박정태의 2루 자리와 테이블세터의 한 축에는 전년도 투혼을 보여준 조성환에게 맡기기로 한다. 신인드래프트에서도 1차 지명으로 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고 판단한 장원준과 김수화, 강민호를 거액에 계약했으며 모든 조짐은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롯데 자이언츠는 그렇게 2004년 시즌을 시작했고 야심차게 뚜껑은 열었으나, 열린 뚜껑을 다시 닫을 수는 없었다.
2004년 롯데의 키스톤콤비는 유망주 박기혁과 박정태 뒤를 이을 조성환이었다. (사진=조선일보)
가장 처음에 이상조짐을 보였던 건 용병진이었다. 작년의 호성적도 있었지만 실상은 펠릭스 호세와 재계약에 실패해 어쩔 수 없이 재계약한 용병 이시온이 무릎부상과 허벅지 햄스트링의 파열로 4경기만에 중도퇴출되었다. 다행히도 빠른 조치로 시애틀에서 뛰던 베테랑 1루수 라이언 잭슨을 데려왔으며 라이언은 비록 선구안에 문제를 드러내긴 했으나 3할 타율에 55타점을 기록하며 빈 자리를 잘 메꿔줬다.
그 다음에 삐끗한 건 내야, 2루수 자리였다. 박정태 대신 2루에 세운 조성환이 4월 24일 개막 한달도 채 되지 않아 LG전에서 상대 투수의 공에 손등을 맞아 골절상을 입으며 전치 7주의 실질적인 시즌 아웃 판정을 받고, 그 외의 대체자원이었던 신명철과 박남섭 1까지 줄줄이 부상을 당해 남은 자원이 기존의 주포 박정태 뿐이었지만 양상문은 끝내 박정태를 올리지 않았다. 리빌딩 과정에서 젊은 선수들을 중용한다는 명목으로 고참선수들을 배제하게 되면서 팀 케미스트리가 점점 무너져 갔고 그 본보기가 바로 롯데의 최고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정태였던 것이다.
박정태는 스프링캠프때부터 쾌조의 컨디션을 보였으나 양상문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박정태를 배제하여 개막엔트리에서도 빼버렸다.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충분히 쓸만했던 선수인 고참 박현승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양상문은 마찬가지 이유로 전력 외 취급을 하여 출장기회를 보장해주지 않은 채 대졸 신인선수인 박진환을 기용했고 이는 석달도 채 되지 않아 삼성전에서 간단한 내야플라이 수비 때 만세를 불러버리는 에러를 범하고 동점이 되면서 한 점차로 앞서던 경기를 역전패에 이르게 했다.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라 박현승을 아주 잠깐 기용했지만 롯데팬들은 구단 홈페이지와 외야에다 박정태를 원한다는 대형 플랜카드까지 걸고 시위를 한 끝에 8월에서야 겨우 박정태가 1군 라인업에 복귀한다. 박정태가 돌아오자마자 홈경기 관중이 평소의 두세배는 넘게 들어왔을 정도였고 적은 경기동안 호성적을 보여준 터라 이 문제로 양상문 감독이 비난을 피할 길은 없었다.
박정태는 리빌딩이라는 이유로 롯데 내야가 허술함에도 기용되지 못했다가 결국 팬들의 플랜카드까지 사직구장에 걸리자 비로소 출전하게 되었다. (사진=구글)
내야 다음은 마운드였다. 롯데 자이언츠의 고질적인 약점인 확실한 마무리가 없다는 사실은 기존의 강상수와 아이들에 대한 불신감만 늘였고 전년도에 오버페이스였지만 그나마 안정적으로 막아낸 임경완 외에는 안심할만한 선수가 없었다. 양상문 감독은 기존의 에이스 손민한을 마무리로 돌리고 시즌을 시작한다는 강수를 둔다. 하지만 손민한이 체질적으로 마무리 스타일도 아니었고 팀 자체도 4년 연속 최하위로 달려갈 만큼 정상이 아닌 터라 전반기에 고작 8세이브를 올리는 데 그쳤고 믿을만한 선수래봤자 상기의 임경완과 이정민 정도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임경완이 22홀드를 기록하며 기량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백인천 시절 혹사 여파가 남은 상황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경기 중반에 등판시켜 '중무리'로 84구를 던지게 하는 양상문 감독의 혹사에 임경완이 허리 부상을 당하자 하는 수 없이 예전의 구위를 잃은 박석진과 지지리도 안 터지던 김대익을 희생시켜 삼성의 우승 당시 마무리였던 노장진을 데려와 시즌 후반부를 맡기게 되고 롯데 불펜진은 2005년 중반까지 짧은 안정기를 가진다.
노장진은 혹사와 부진보다 자신의 멘탈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사진=구글)
FA선수들은 더욱 처참했다. 4년 총액 22억의 거대계약으로 영입한 선발 이상목은 최종성적 3승 9패라는 가성비 최악의 성적을 내며 침몰했고, 6년 40억 6천만에 계약하여 1번타자의 빈자리를 메꿔주리라 믿었던 전국구 인기스타 정수근은 4년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OB-두산 시절 빛나던 모습과는 달리 롯데에서는 타율 2할5푼에 24도루라는 하락세가 다분한 성적을 첫 해에 보여준다. 성적까지는 나이가 들었으니 어찌할 수 없다 쳐도 노쇠화로 인한 수비범위 축소와 더불어 이적 첫 해 해운대에서 낸 음주폭행사고를 시작으로 사건사고의 주인공이 된 채 점점 나태해져 결국 사생활 문제로 인하여 방출되고 그대로 은퇴한다.
40억을 받고 정수근이 롯데에 남긴 건 사직구장의 인조잔디를 천연잔디로 바꿔달라고 한 것이 전부였다.
'대도' 전준호의 이적 이후 끊임없는 빈자리였던 1번 타자의 자리를 FA 정수근이 메꿔줄거라 기대했지만 바뀐건 사직구장의 잔디였다. (사진=일간스포츠)
롯데 암흑기의 추억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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