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시절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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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유나이티드는 이번 시즌 1999년부터 쓰고 있던 로고를 변경했다.

 

다음(DAUM)의 축구 카페인 '아이러브사커'에서 시작되었던 신조어다. 당시에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할 당시 같은 팀 소속이었던 앨런 스미스가 포지션 변경 및 그로 인한 부진에 빠지자 당시 카페 회원들은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때의 앨런 스미스가 잘했다며 댓글로 '앨런 스미스 리즈 시절 포스 ㅎㄷㄷ' 등으로 쓰다가 줄여서 '리즈시절 ㅎㄷㄷ' 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시 앨런 스미스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할 당시에 프리미어리그는 국내에서 각종 매체로 접하기 힘든 시절이어서 다른 커뮤니티인 '디시 인사이드'에서 '아이러브사커' 회원들의 스노브[각주:1] 행태를 비꼬는 표현으로 '리즈시절'이라는 단어가 인터넷 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2000-01 시즌의 리즈 유나이티드

 

이 단어는 초반에는 축구 팬 사이트에서만 사용되었으나, 2009년 가량을 기점으로 다른 카페에서도 급속도로 이 단어가 퍼져나가면서 연예인들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의 전성기 시절을 '리즈시절'이라 표현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주로 지칭하는 사람의 젊을때 잘 나갔던 시절이라는 표현에 '리즈시절'을 쓰면서 '어린시절', '초기시절'이라는 표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에 앨런 스미스가 가장 잘하던 시절의 리즈 유나이티드는 어떤 스쿼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선수들이 당시에 얼만큼 활약을 해주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앞으로 이 기사를 본 사람은 어느정도 리즈 시절의 리즈 유나이티드에 대해 이제는 이야기해볼 수 있게 만드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팀 스쿼드 보기에 앞서 과연 리즈시절은 정확히 어떤 시즌을 지칭하는 걸까. 리즈 유나이티드는 두 번의 전성기가 있다. 처음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으로 리그 우승 및 70년대 중반에는 유럽대항전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당시 요한 크루이프(Johan Cruijff)가 이끄는 AFC 아약스 전에 유럽 최강 클럽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들 리즈시절이라 말하는 시절은 2000-01시즌이다. 이 당시 유명한 '폐인양성' 축구게임인 풋볼 매니저(Football Manager)의 전신인 챔피언쉽 매니저(Championship Manager)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게임상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는 젊고 유망주가 넘치는 선수들로 가득차 있던 팀이었다. 또한 당시에 이전 시즌에서 성적이 좋던 팀에 고무되어 구단이 팀 재정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비싸게 사들인 젊은 선수들이 팀에 가장 많이 머물러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어리석었던 스쿼드지만, 또 어떤 팀보다 막강했던 스쿼드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2000-01시즌 리즈 유나이티드의 스쿼드를 알아보자.

 

등번호 1번 GK 나이젤 마틴 (Nigel Martyn, 2000-01시즌 나이 33세)

 

나이젤 마틴은 기복 없이 마지막까지 꾸준한 선수였다.

 

1966년 8월 11일 잉글랜드 출생. 브리스톨 로버스에서 데뷔해 당시 잉글랜드 축구에서 골키퍼로는 최초로 1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크리스탈 팰리스로 이적한다. 당시 그 몸값만큼이나 마틴은 잉글랜드의 최고의 골키퍼였으며, 1989년부터 1996년까지 7시즌 동안 272 경기를 뛰면서 크리스탈 팰리스를 1990년 FA컵 준우승, 1990-91시즌 리그 3위 등을 기록하는데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1996년 그는 기존의 이적료의 두 배 이상인 225백만 파운드를 받고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된다.

 

리즈 유나이티드에 입성해서도 마틴은 꾸준했다. 특히나 2000-01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그렇게 6시즌 동안 207경기를 뛰면서 리즈 유나이티드의 '리즈시절' 황금기의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하지만 점차 성장하는 신예 골키퍼 폴 로빈슨을 키우려는 구단의 방침과 부딪혀 세컨 골키퍼를 구하고 있던 에버튼으로 이적을 결정한다. 이적 후 에버튼에서도 안정적이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당시 데이비드 모예스(David Moyes) 감독의 극찬을 받으며 2006년 'Big Nige'라는 별명과 함께 은퇴한다.

 

2 DF 개리 켈리 (Gary Kelly, 26세)

 

묵묵히 리즈의 오른쪽 수비를 지켜준 개리 켈리

 

1974년 7월 9일 아일랜드 출생. 아일랜드에서 스트라이커로 축구를 시작한 개리 켈리는 17살에 리즈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으로 들어온다. 이때 유소년 시절의 켈리를 본 당시 리즈의 마지막 리그 우승을 만든 하워드 윌킨슨(Howard Wilkinson) 감독은 켈리가 공격수 보다는 좋은 윙백의 자질이 있다 판단하고 윙백으로 포지션을 바꾼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1-92시즌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리그에 훌륭한 모습을 보인 켈리는 94년 미국월드컵 아일랜드 대표팀에도 승선했으며, 그가 23살인 1997-98 시즌에 조지 그레이엄(George Graham) 감독은 켈리를 주장으로 임명한다. 그리고는 1998-99 시즌을 제외하고는 리즈 유나이티드의 오른쪽 윙백 자리를 꾸준히 지키며 리즈 유나이티드의 원클럽 맨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그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뛴 경기수는 무려 430경기였다.

 

3 DF 이언 하트 (Ian Harte, 23세)

 

'황금 왼발' 이안 하트

 

1977년 8월 31일 아일랜드 출생. 이언 하트 역시 같은 아일랜드 출생 개리 켈리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서 유소년을 잠시 보내고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성인 프로 데뷔무대를 가진다. 그는 마치 동시대의 레알 마드리드의 호베르투 카를로스(Roberto Carlos)처럼 처음부터 팀을 떠날때까지 묵묵히 왼쪽 윙백을 맡고 있었으며,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도 아일랜드 대표팀에서도 전문 프리킥과 장거리 슛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점이 닮았다. 하지만 2004년 팀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떠나게 되고 그 후로 저니맨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2015년 본머스에서 은퇴를 한다. 재미있는 점은 위의 개리 켈리가 하트의 삼촌이며, 아스널의 홈구장인 하이버리에서만 3시즌 연속 골을 넣기도 했다.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213경기를 뛰며 수비수이지만 28골이나 기록했다.

 

4 MF 올리비에 다쿠르 (Olivier Dacourt, 26세)

 

다쿠르는 끈적한 수비와 좋은 패스로 공수 모두 완벽한 선수였다.

 

1974년 9월 25일 프랑스 출생. 끈질긴 수비와 뛰어난 발재간을 가진 수비형 미드필더다. 프랑스의 옥세르에서 데뷔전을 치뤘으며, 6 시즌을 뛰던 도중 클럽에 대한 불만으로 팀을 떠나 한 시즌을 에버튼에서 보내고 다시 프랑스 랑스로 복귀한다. 어떤 클럽이든 팀의 중심이 되면서 수비와 공격을 조율해줄 수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절실한 만큼 리즈 유나이티드는 팀의 이적 기록을 세우며 720만 파운드로 다쿠르를 영입한다. 하지만 영입한 그 시즌에 리즈 유나이티드는 리그 4위,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고, 프랑스 대표팀으로도 뽑히게 된다[각주:2]. 하지만 새로운 감독이 오면서 다쿠르는 출장기회가 줄어들고 다쿠르는 AS로마로 임대이적하게 되며 그 후로도 인테르로 이적해 훌륭한 모습을 보인다. 최종 팀은 벨기에의 스탕다르 드 리에주팀과 1년 계약을 맺었고 우리가 잘 아는 벨기에 국가대표 스테번 드푸르(Steven Defour)가 부상을 당하면서 공백이 생기자 악셀 비첼(Axel Witsel)과의 더블 볼란치를 맡을 선수로 다쿠르를 선택했다.

 

5 DF 루카스 라데베 (Lucas Radebe, 31세, 주장)

 

"This is my hero" - 넬슨 만델라

 

1969년 4월 12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생.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영웅이라 칭한 사나이. 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첫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았던 "The Chief" 루카스 라데베는 처음에 프로 데뷔는 골키퍼로 경력을 시작했다가 중앙 수비수로 전환을 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처음에 라데베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중요한 선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 소속팀인 카이저 치프에서도 썩 뛰어나지 않은 수비수였다. 하지만 1994년 리즈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트라이커 필 마싱가(Phil Masinga)를 영입하면서 같은 국적의 동료를 친구로 한 명 더 영입한다는 개념으로 라데베를 선택했다.[각주:3]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데베는 마싱가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수비와 각 조율을 담당했다.

 

리즈시절인 2000-01시즌에 리즈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었으며, 당시 뛰어난 활약으로 맨체스터 알렉스 퍼거슨 또한 한 인터뷰에서 " Everyone should be interested in Lucas (모두가 루카스에 관심이 있다.)"라는 말을 했고, 실제로 맨유를 비롯해 AC밀란, AS로마 등에서 그를 영입하려 했으나 라데베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지켰다. 하지만 그 시즌 이후 무릎과 발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2년동안 경기도 뛰지 못했으며 결국 2005년 201경기를 리즈에서 보내고 은퇴를 선언한다.

 

6 DF 조나단 우드게이트 (Jonathan Woodgate, 20세)

 

리즈 유스에서 가장 성공한 수비수. 하지만 그의 유리몸이 더 유명해졌다.

 

1980년 1월 22일 잉글랜드 출생. 우드게이트는 미들즈브러 출신으로 당연히 미들스브러 프로팀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럽과 가족과의 갈등으로 리즈 유나이티드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1997년 FA 유스컵에서 우승을 했으며, 그해 10월에 프로에서 데뷔했다. 쟁쟁한 리오 퍼디난드, 루카스 라데베, 도미닉 마테오 등과 함께 경쟁과 함께 그들의 많은 경력과 스킬을 배우면서 리즈 유스 아카데미를 거친 가장 완벽한 수비수로 자리 잡을 무렵,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부상이 점점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재정이 어려워지자 리즈는 빠르게 뉴캐슬에 900만 파운드에 이적을 시켰고, 뉴캐슬에서 첫 시즌은 꽤 괜찮은 시즌을 보냈지만 결국 이번에도 부상으로 시즌을 일찍 접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2004년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1,340만 파운드에 영입을 한다. 이미 부상상태에서 마드리드로 간 우드게이트는 부상으로 2시즌에 고작 리그 9경기 밖에 뛰지 못한다. 그는 고향팀 미들스브러에서 다시금 폼을 살려 토트넘으로 이적했으나 여전히 부상은 그를 따랐고, 스토크 시티를 거쳐 자신의 고향인 미들즈브러에서 은퇴를 한다. 2007년 우드게이트는 스페인 마르카에서 선정한 21세기 최악의 영입에 뽑히기도 했다.

 

7 FW 로비 킨 (Robbie Keane, 19)

 

인테르에서 임대해 좋은 활약을 보였던 로비 킨은 리즈로 완전 영입이 되자 부진했다.

 

1980년 7월 8일 아일랜드 출생. 울버햄튼 원더러스에서 17살에 데뷔를 한 로비 킨은 데뷔전 에서 2골을 넣으며, 두 시즌 동안 24골을 넣는다. 특히나 1998-99시즌에는 16골을 넣으며 클럽 득점왕으로 기록된다. 그는 십대의 나이에 600만 파운드로 코벤트리 시티로 이적했고, 이는 당시 십대 선수의 이적료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코벤트리에서도 무스타파 하지(Mustapha Hadji), 유세프 치포(Youssef Chippo) 등과 함께 31경기 12골을 넣으면서 대형 스트라이커로의 자질을 보인다.

 

이에 빅클럽 인테르는 2000년 7월 두 배가 뛴 1,300만 파운드에 영입한다. 하지만 영입을 원했던 마르셀로 리피(Marcello Lippi)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인 마르코 타델리(Marco Tardelli) 감독의 전술에 녹아들지 못하면서 리즈 유나이티드로 임대이적을 하게 된다. 다시금 잉글랜드 무대로 돌아온 킨은 다시금 득점포를 가동해 18경기에 9골을 기록하며 리즈 유나이티드의 중요한 게임마다 골을 넣어준다. 이에 고무된 리즈 유나이티드는 1,200만 파운드로 킨을 영입하지만 다음 시즌의 킨은 너무나도 부진했고 결국 다음 시즌에 토트넘 핫스퍼로 700만 파운드에 이적을 결심한다.

 

하지만 토트넘으로 이적하면서 킨은 제2의 전성기를 보였고, 실력뿐 아니라 부상으로 빠져있던 주장자리에, 부주장으로서 토트넘의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토트넘에서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1998년부터 시작한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역시 2016년까지 18년을 뛰어오면서 146경기 68골을 기록한다.

 

8 FW 마이클 브릿지 (Michael Bridges, 22세)

 

딱 한 시즌만 반짝한 유망주를 뽑으라면 늘 이 선수 이름이 올라와있다.

 

1978년 8월 5일 잉글랜드 출생. 선더랜드에서 프로데뷔를 시작한 마이클 브릿지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가장 돋보이는 젊은 잉글랜드 스트라이커였다. 하지만 그의 실력과는 별개로 선더랜드는 1996-97시즌 강등되었고, 500만 파운드에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그는 첫 시즌 개리 맥알리스터(Gary McAlister) 이후 사우스햄튼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리즈 선수가 되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리그 19골로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후 4 시즌을 부상으로 날려먹으며 4 시즌 동안 10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 후로 여러 팀들을 임대와 이적을 거치다 2015년 은퇴를 선언한다.

 

9 FW 마크 비두카 (Mark Viduka, 24세)

 

당시 비두카의 득점 능력은 과히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1975년 10월 9일 호주 출생. 그는 멜버른 나이츠에서 뛰어난 성적(48경기 40골)을 거두고,[각주:4] 크로아티아 기반 클럽인 멜버른 나이츠에 따라 크로아티아의 디나모 자그레브로 이적을 하게 된다. 그는 디나모 자그레브에서도 84경기에 40골을 거두면서 세계 각 팀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350만 파운드에 스코틀랜드의 명문 셀틱으로 이적한다. 스코틀랜드 리그에서도 역시 비두카는 득점포를 멈추지 않는다. 2시즌만에 37경기 30골을 넣으면서 삼각편대의 꼭지점에 있는 공격수를 원하던 리즈 유나이티드의 레이더에 걸려들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600만 파운드로 시즌 바로 직전 비두카와 계약을 완료했다. 데이비드 오리어리(David O'Leary) 감독의 계획은 마이클 브릿지-마크 비두카-해리 키웰의 삼각편대를 구상했으나 브릿지와 키웰이 부상을 당하면서 비두카는 젊은 피 앨런 스미스와 투톱을 이뤄낸다. 그는 가장 리즈에서 성공적인 공격수로 4시즌 동안 130경기 59골을 넣으면서 수 차례 해트트릭과 멀티골을 기록하며 리즈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이끌어낸 공격수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비두카 역시 클럽의 재정 위기로 인해 미들즈브러로 팔리고 만다.

 

그는 미들즈브러에서 부상으로 주춤한적은 있었지만, 역시나 훌륭한 모습을 보이며 미들즈브러의 공격의 큰 축을 담당한다. 하지만 문제는 2006-07 시즌에서 계약이 만료되면서 비두카는 재계약의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같은 라이벌 팀은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료 없이 이적해 마이클 오언(Michael Owen), 오바페미 마르틴스(Obafemi Martins)와 함께 삼각 편대를 이루며 강등권에 있던 뉴캐슬을 극적으로 구해낸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상으로 그는 심각하게 선수 생활을 고민했으며 결국 2009년에 뉴캐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Part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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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nobbism / 지적허영: 지적 허세를 부리는 눈꼴사나운 태도를 한 단어로 일컫는 영어 단어 [본문으로]
  2. 당시 한국이 5대0으로 졌던 그 경기에 다쿠르가 있었다. [본문으로]
  3.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에밀리아노 기론 투수가 펠릭스 호세의 말동무용으로 영입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본문으로]
  4. 나이츠 홈구장 관람석에 '마크 비두카 스탠드'가 있을 정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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