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UA] 1. 파울로 완초페 (Paulo Wanc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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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의 1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황색언론의 2018 새해 프로젝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SNS에서 핫한 분들과 인터뷰를 하는 핫톡(Hot Talk),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걸그룹에 대해서 알아보는 '걸그룹대백과'에 이어, 이번에는 축구로 넘어가 우리가 늘 말하는 월드클래스급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기억에 잊혀져 가는 슈퍼스타를 다시금 찾아보는 'Where U At'의 줄임말인 'WUA' 코너를 시작하겠다. 그 WUA의 첫 번째 주인공은 올드팬들은 가끔 벌어졌던 국가대표팀 평가전에서 기억코스타리카의 스트라이커 파울로 완초페에 대한 이야기다.

 


 

'코스타리카 최고의 공격수' 파울로 완초페

 

코스타리카의 최고의 공격수 '파올로 완초페'

 

소년

 

1976년 7월 31일생인 파울로 완초페(Paulo Wanchope)는 코스타리카 에레디아에서 태어났다. 1993년 만 16세의 나이로 자신의 고향팀인 CS 에레디아노에 입단해 1997년까지 14경기에 출장해 20골을 넣었다. 이러한 득점 능력을 좋게 평가한 잉글랜드의 더비 카운티는 완초페와 함께 그의 동료인 마우리시오 솔리스를 1997년 3월 21일에 60만 파운드로 영입하게 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더비 카운티

 

잉글랜드에 입성한 완초페의 데뷔전 상대는 무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 경기에서 완초페는 데뷔골과 함께 팀의 승리를 이끌며 화려한 프리미어리그 입성을 하게 된다. (사진=구글)

 

완초페는 더비 카운티에 입단해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그것도 클럽 창립 125주년 행사로 치뤄졌던 데뷔전이었는데, 상대는 당시 역대에 없었던 2년 연속 더블인 '더블-더블'을 기록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하지만 완초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4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당대 최고의 골키퍼인 피터 슈마이켈 뒤로 골을 꽂아넣으며 3대2의 승리를 견인했다. 첫 시즌인 1997-98 시즌에 13골을 넣으면서 1989년 이후 더비 카운티는 최고 성적을 냈으며,  통산 두 시즌 동안 83경기 28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완초페는 1999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350만 파운드로 이적하게 된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비록 한 시즌만 웨스트햄에서 뛴 완초페지만, 파올로 디 카니오(왼쪽)과 함께 31골을 만들어낸다. (사진=구글)

 

업튼 파크에 입성한 완초페는 유럽대항전 컵대회인 인터토토[각주:1]에서 네덜란드의 헤렌벤을 상대로 1999년 7월 28일 데뷔전을 치뤘다. 단 한 시즌만 뛰었던 웨스트햄이었지만, 자신과 투톱을 이루었던 이탈리아의 공격수 파올로 디 카니오와 그 시즌에 도합 31골을 기록하면서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팀을 인터토토컵의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2000년 시즌에 웨스트햄은 아스널에서 다보르 수케르를, 세비야에서 프레드릭 카누테를 영입하며 공격수 포지션이 포화상태가 되었고, 결국 한 시즌만에 365만 파운드로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게 된다.

 

 맨체스터 시티

 

가장 많은 시즌을 보낸 맨체스터 시티. 그는 자신의 마지막 시즌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강등권으로 부터 구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진=PA)

 

앞선 두 팀 보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완초페는 가장 빛났다. 이적한 첫 시즌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비롯해 9득점을 기록했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2000-01 시즌 강등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완초페는 여전히 맨체스터 시티에 남아 15경기에 출장해 12골을 넣었으며, 결국 한 시즌만에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승격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승격과 함께 부상을 입어 다음 시즌을 그대로 허무하게 보내게 되지만, 2003-04 시즌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강등을 피하는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완초페는 당시 맨체스터 시티 팬들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사우스햄튼에서 TV 마이크를 잡고 함성을 지르는 장면은 아직도 시티 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장면이다.

 

프리미어 리그를 떠나서

 

그렇게 맨체스터 시티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였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새로운 팀을 구상하고 있던 중이었고 완초페는 결국 스페인의 말라가 CF로 이적하게 된다. 그렇게 말라가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로 계속해서 완초페는 저니맨 신세를 면치 못하고 그나마 그 팀에서도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한다. 2005년에는 카타르의 알 가라파, 2006년에는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 센트럴에서 뛰었다. 그러다 2006년 12월 29일 일본 J1 리그의 FC 도쿄에 입단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일본의 젊은 스트라이커 소타 히라야마와 함께 장신 스트라이커 투톱을 이루며 일본에서의 한 시즌을 보내고 미국의 시카고 파이어와 1년 계약을 했지만 2007년 12경기 2골에 그치면서 자신의 오래된 무릎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영국에서의 코치 연수를 원한다는 말과 함께 은퇴를 선언한다.

 

 국가대표팀

 

2006년 개최국 독일을 상대로 비록 졌지만 2골을 기록한다. (사진=ISI 포토)

 

완초페가 우리나라 축구팬들에게도 낯이 익은 이유는, 2000년과 2002년 두 번의 골드컵에서 만나 3골이나 먹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중미팀을 제외하고는 카메룬과 함께 가장 많이 골을 넣은 상대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완초페는 1995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코스타리카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것으로 시작해 1996년 10월 A매치 데뷔를 했다. 2002년, 2006년 두 번의 월드컵 본선에 나와 3골을 기록했으며, 2002년 월드컵 조예선 터키와의 경기에서는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기도 했다. 완초페는 2006년 피파 월드컵 독일전에서 2골을 넣으며 자신의 A매치 45번째 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A매치 47골을 기록한 롤란도 폰세카 뒤를 이은 두번째의 기록이다.

 


 

그 후로 완초페는 감독으로 자신의 첫 번째 팀이었던 CS에레디아노로 복귀해 감독을 맡다가, 영국으로 코치 연수를 원하는 과정에서 중도 해임이 되었다. 이후 코스타리카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의 자격으로 호르헤 핀투 감독과 함께 2014년 월드컵에서 조국 코스타리카를 D조 1위로 (2승 1무) 다음 라운드에 진출시키 이어 맞붙은 그리스와의 승부차기 끝에 8강까지 가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호르헤 핀투 감독이 사임한 코스타리카 대표팀을 이어받아 2014 코파 센트로아메리카나 우승을 이끌며 2015년 2월 2일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8월 12일에 열린 U-23 대표팀 경기 도중 무승부로 끝난 경기에 불만을 품고 경기장 보안요원과의 싸움과 그라운드 난입 등으로 불미스러운 사건[각주:2]이 벌어진 뒤 다음날 감독을 사퇴하게 된다.

초반 수속코치로서의 시작은 좋았으나, 얼마가지않아 폭행사건에 휘말리며 대표팀 감독직을 내려놓게 된다. (사진=게티이미지)

 

완초페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코스타리카 국가대표팀을 했던 롤란도 폰세카보다 클럽이나 A매치 득점 기록[각주:3]은 떨어지지만, 폰세카의 소속팀이 대부분 중남미 클럽이었던 것에 비해 완초페는 20살부터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왔고, 특히나 맨체스터 시티에서의 중요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선수로 폰세카의 커리어보다 훨씬 위에 있는 선수로 평가된다. 또한 선수로도 3골을 기록하고, 수석코치로 8강으로 견인한 코스타리카의 월드컵에 있어서도 최고의 공헌을 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또 새로운 팀에서 감독 혹은 코치의 자리에서 선수시절 보여주었던 날카롭게 파고들던 그 센스를 보여줄 파울로 완초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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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2010시즌 유럽대항전의 형식이 크게 변경되면서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2. 경기 후 "이 경기는 승부조작"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클럽 440경기 234골 / A매치 113경기 47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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