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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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나라도 10개팀이 다 있는 단일리그가 아닌 드림리그와 매직리그와 나뉘어 양대리그제를 치뤘던 적이 있다. 리그간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결국 무산되었지만 무산된 여러가지 원인 중 하나는 당대 최강의 강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였다. 현대 유니콘스는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의 18승 선발투수를 3명이나 배출하고 30-30클럽에 국내 최초로 가입한 박재홍 등의 전력에 힘입어 91승 40패로 당시의 시즌 팀 최다승 기록을 세우며 드림리그 1위를 차지했고 드림리그 2위인 두산마저도 우동수[각주:1] 트리오의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현대에 이은 76승이라는 호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매직리그 1, 2위팀인 LG(67승)와 롯데(65승)는 모두 드림리그 3위인 삼성의 69승 59패만도 못한 성적을 내면서 심각한 리그 불균형을 자아냈고, 결국 다음해 한국프로야구는 단일리그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현대 왕조의 18승 트리오 임선동, 정민태, 김수경 (왼쪽부터) (사진=엠스플뉴스)

 

그만큼 멀쩡한 단일리그를 분할하거나 분할된 리그를 합치고 새로운 팀이 늘어나는 건 모두에게 부담이 따르며 또한 납득할만한 이유도 있어야만 한다. 당장 최근 MLB의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아메리칸 리그로의 이동과 우리나라의 NC, kt의 창단 같은 상황도 일처리에서는 상당한 갈등과 논의를 거쳤다. 그렇다면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새 리그를 만들때 어떤 진통을 겪었을까?

 

일본 프로야구는 1936년에 출범했다. 당시 1934년 강자 먼저 창설된 도쿄 교진군(現 요미우리), 오사카 타이거즈(現 한신), 한큐(現 오릭스), 세네터스(해체) 등의 7개 구단으로 시작해 1936년 4월에 첫 프로야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7년 고라쿠엔 이글스(해체)가 합류하고, 1938년부터는 난카이(現 소프트뱅크)가 합류해 9개 구단의 단일리그로 성장했다. 하지만 인기를 얻던 프로야구는 전쟁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며 결국 패전위기가 코앞이던 1945년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는 잠시 끊긴다. 그리고 1946년 6년전에 해체된 세네터즈를 재건한 도큐 플라이어스(現 닛폰햄)가 다시 리그에 합류하면서 잠시 주춤했던 일본 프로야구는 양적으로도 크게 성장하며 단일리그 8개팀에 리그 참여를 원하는 팀들의 추가로 덩치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단일리그를 양대리그로 만들어버린 남자, 벳쇼 아키라 (別所昭)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당시 난카이 호크스의 유니폼. 투수모델은 벳쇼 아키라, 포수 모델은 '도카벤' 카가와 노부유키(香川 伸行)다. (사진=구글)

 

1947년 관서의 대형 사철그룹인 난카이 전기철도를 모기업으로 난카이군에서 난카이 호크스로 개명한 난카이는 1949년 뜻하지 않은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된다.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1947년 55회 등판해서 47 완투와 30승의 전설을 세운 선 굵은 미남인 최고 스타 벳쇼 아키라(別所昭)가 타구단과 교섭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문제는 타구단의 정체는 늘 그렇듯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다. 1948년 난카이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벳쇼는 오프시즌 중 난카이와의 연봉협상이 전혀 진행되지 않은 채 불만에 차 있던 벳쇼에게 연봉협상을 제의했다. 벳쇼는 학생시절부터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으나 당시엔 양육권자, 즉 부모님에 의한 계약이 우선시된다는 어이없는 규정이 존재했고 집도 계약한 구단인 난카이의 홈그라운드인 효고 현이었다.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난카이에서 47완투 30승의 전설을 세운 벳쇼 아키라 (사진=구글)

 

앞서 설명했던 국내 프로야구 초창기가 거의 주먹구구식 운영이라고 했지만 일본 프로야구 역시 출범 초기엔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당시엔 계약절차에 의한 명문화된 협약이나 계약서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선수의 소유권이라는 게 굉장히 애매모호한 상황에 있었다. 물론 각 구단들 역시 주력 선수들에겐 호화주택이나 자동차를 선물하거나 해서 머무르게 했다지만 당시 난카이 전기철도는 그렇게 부유한 구단이 아니었다. 특히나 난카이 측에서는 1947년 벳쇼가 그해 창설된 사와무라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었고 1948년도 26승을 거둬 우승에 크게 기여했지만 근속년수가 낮다는 이유를 연봉협상에서 들어 벳쇼 아키라는 또 한번 어이없이 낮은 연봉의 피해자가 되었다. 벳쇼 역시 사전에 타팀의 간판스타인 '야구의 신' 가와카미 테츠하루(川上哲治)나 도큐 플라이어즈의 오시타 히로시(大下弘)가 받는 연봉과 혜택을 조사해 당해 연봉협상에서 주택과 연봉협상을 요청했지만 구단측에서는 협상을 거부했다. 당연히 거액을 제시한 요미우리의 제안에 벳쇼의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전(戰)후 우승이 없었고 주전 투수들이 대부분 부상이나 부진으로 침체된 상황의 요미우리는 정보통을 통해 벳쇼가 대우면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걸 파악해 벳쇼에게 접근했으나 난카이 측도 벳쇼에게 요미우리가 접근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1949년 1, 2월 차례로 난카이 구단과 벳쇼 아키라는 각각 일본 야구연맹에 호소했고 호소에 따라 일본야구연맹의 조사 끝에 타구단의 사전접촉을 인정하고 재협상기간을 가지라는 결론을 짓는다.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난카이의 어이없는 연봉정책에 실망한 벳쇼 아키라는 징계를 감소하고라도 자신의 꿈이었던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었고, 심지어 과거를 모두 부정한다는 듯 이름마저도 벳쇼 다케히코로 개명한다. (사진=구글)

 

하지만 벳쇼는 결국 난카이와의 계약을 거부하고 2개월간의 징계를 감수한 채로 요미우리와 계약한 후 과거 난카이 선수로 뛰었던 역사를 부정한다는 듯이 이름마저 벳쇼 다케히코(別所毅彦)로 바꿔버렸다. 새로운 이름까지 가진 벳쇼 다케히코는 요미우리의 첫 우승인 1951년에 크게 활약하고 다음해 1952년 일본시리즈 MVP, 1955년 23승을 기록하며 두 번째로 사와무라상을 수상해 통산 200승에 빛나는 절대적 에이스로 군림한다.

 

한편 에이스를 잃은 난카이는 전년도 우승팀에서 4위권으로 처참하게 침몰한 채 후일 일본야구 최강의 잠수함 투수 스기우라 타다시(杉浦忠)가 나타나기 전까지 기나긴 침체기를 보낸다. 벳쇼 다케히코가 요미우리에서 12년 동안 리그 우승 10번과 일본 시리즈 우승 5번을 안겨다준 동안 난카이 호크스는 앞서 설명한 스기우라 타다시의 투혼으로 1959년 한번의 일본시리즈 우승만을 차지했다.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벳쇼를 빼앗긴 난카이는 추락을 피할 수 없었다. 단지 일본야구 최고의 서브마린 스기우라 타다시의 투혼으로 우승한 1959년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사진=구글)

 

그저 전설적인 선수의 이적사례 중 하나였던 일명 '벳쇼 빼앗기' 사건은 무수한 나비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마이니치 신문이 자기 팀인 마이니치 오리온스(現 롯데 마린스)를 창단해 일본야구연맹에 가입을 신청했지만 요미우리 신문과 중앙 일본신본(現 주니치 신문)이 격하게 반대하면서 신규 구단 창단에 인색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던 무렵에 연이어 벌어진 벳쇼 다케히코의 이적은 요미우리와 그 외 다른 구단들의 신경전이 극도로 치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중재를 맡던 일본야구연맹은 결국 갈팡질팡하다 해체되고 만다. 중심을 잡아줄 연맹이 각자 뜻이 달라 뿔뿔이 흩어져 해체되고 나니 결국 야구계의 판도는 새 구단을 반대하는 친(親) 요미우리 진영과 반(反) 요미우리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친 요미우리 진영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센트럴리그 (사진=구글)

 

이때 친 요미우리 진영은 요미우리를 필두로 주니치와 한신을 비롯한 센트럴리그가 결성되고, 반 요미우리 진영은 벳쇼 다케히코 스틸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난카이와 함께 요미우리의 반대가 심했던 마이니치 오리온즈의 주도로 퍼시픽리그를 결성하며 독립하게 된다. 그렇게 일본의 양대리그는 센트럴리그 사무국과 퍼시픽리그 사무국이 각각 따로 담당을 하다가 1951년 일본 프로야구 조직으로 통합되면서 일본야구연맹은 현재의 일본야구기구로 거듭나게 된다.

 

리그를 나눈 남자, 벳쇼 아키라 1부반 요미우리 진영인 난카이와 마이니치를 필두로 만들어진 현재의 퍼시픽리그 (사진=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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