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탐정 사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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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독자를 기만한 작품'이라고 하면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연재를 아예 놓은 작품? 연재는 하고 있지만 사실상 끝날 기미가 없는 작품 혹은 끝내지도 못한 채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에서 작가가 급서한 작품? 여러 작품이 많겠지만 현시대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을 딱 하나만 적자면 다중인격탐정 사이코(多重人格探偵サイコ)를 꼽고 싶습니다.

 

나나? 일단 작가분은 살아있잖아요. 파이브 스타 스토리? 그래도 나가노 마모루는 돈 떨어지면 열심히 그릴 겁니다. 구인 사가? 원작가 구리모토 카오루는 서거하기 전까지 작품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최소한 사이코와 비교될 정도의 작품은 아닙니다. 이제는 초반의 센세이션도 끝나버리고 추할 대로 추하게 끝나버린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오오츠카 에이지, 타지마 쇼우 /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사진=구글)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는 1997년 연재를 시작한 작품입니다. 그림작가도 타지마 쇼우(田島昭宇)라는 걸출한 작가지만 스토리작가 오오츠카 에이지(大塚英志)가 좀 더 유명합니다. 오오츠카 에이지는 일본의 아주 대표적인 만화평론가 중 하나로 잡지 편집자 출신에 교양서나 작법서도 여럿 내서 대박을 쳤을 정도로 명성을 얻고 대학교 교수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네임밸류와 별개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스토리나 연출이나 죄다 시궁창 그 자체입니다. 특히 수많은 작품 중 하나인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는 표현의 자유 문제로 일본 만화사에 이름을 남긴 만화입니다.

 

만화의 왕국이라는 일본에서도 경악해서 연재를 늦출 정도의 과격하고 피 철철 흐르는 묘사와 사람 뇌를 노출시키고 꽃을 심어 키운다거나 하는 등의 정신 나간 장면으로 인하여 각 지방자치단체 유해도서로 지정된 건 기본에 성적인 묘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습니다. 초반부의 이 만화는 세기말을 앞둔 1997년 만화라고 가정해도 굉장히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만화였고 다중인격이라는 요소 역시도 당시의 세기말적 분위기와 더불어 미스터리로 매우 훌륭한 장치였던지라 소설화되어 국내에 발매된 적도 있고 TV드라마까지 나왔었습니다.

 

스토리 작가 오오츠카 에이지 (사진=슈프레)

 

하지만 그 파죽지세는 초창기의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처음에 소년지(소년 에이스)에 연재되었던 이 만화는 중간에 여러 이유로 2001년부터 장기 휴재를 겪었고 2007년부터는 청년지인 코믹 차지(영 에이스)에서 연재를 재개했습니다. 하지만 재개한 이후의 사이코는 더 이상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다소 앞서나가던 파격적인 만화였지만 5년이 넘도록 휴재를 하니 그 파격성은 어느덧 평범한 것이 되어 '옛날에 잘 나갔던 만화'로 남아버렸습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스케일이 커지는 8, 9권 정도부터는 아예 제목도 굳이 '다중인격탐정'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동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누계 900만 부라는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하게 된 이유는 그림작가인 타지마 쇼우의 트렌디하고 날카로운 그림체의 힘이겠지요. 화력(畫力) 하나만은 확실한 작가입니다. 특히 이야기 전체의 설정을 관통하는 것이 안구에 새긴 바코드를 중심으로 '루시 모노스톤'이라는 초월적 인격을 전송한다는 설정이고 이게 다중인격의 한 정체라는 게 나오면서는 미스터리로서의 개연성도 잃고 현실에 발을 담그는 개념 역시 사라졌습니다.

 

스토리는 8권이 넘어서면서 점점 개연성마저 사라진다. (사진=구글)

 

아예 애초부터 판타지라면 좋았으련만 휴재를 깨고 나오니 더 자극적이고 훌륭한 설정의 경쟁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중반 이후부터는 고어스러운 묘사와 그림체만 좋은 어정쩡한 스릴러물이 되어버렸고 더 뒤의 내용으로 가면 '태고 이전부터 살아온 존재'에 막달라 마리아를 결합시킨 일본만화에서 아주 흔하게 보이는 태고의 초월자 운운하는 범작으로 변합니다. '사실 히로인이 최종보스였다'는 아주 뻔하디 뻔한 클리셰는 그냥 웃고 넘어갈 정도라 쳐도 후반부에는 아예 최종보스를 만나러 가는 며칠간의 시간과 몇몇 레트로 소재들을 끌어들여 주역 둘이 최종보스의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합체 (마치 드래곤볼의 "퓨전!" 같은) 하는 전개가 나옵니다.

 

결국 마지막은 다중인격도 없고 탐정도 없고 사이코도 없는 건조한 액션 만화로 마무리됩니다. 이런 괴상한 엔딩마저도 스토리 작가가 최대한 납득할 정도의 결말을 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고 원래 구상한 엔딩은 더욱 한심한 결말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이렇게 작품이 사실상 폭파되었습니다.

 

뜬금없는 레트로 소재의 합체같은 괴상한 전개들 (사진=구글)

 

스토리 작가는 2차 창작자들을 위해 일부러 떡밥을 던지고 세계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했지만 이렇게 폭파된 작품에 2차 창작이 존재할 리가 없지요. 독자 입장에서 이 만화를 거의 15년을 넘게 보아 왔지만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쪽의 스레(인터넷 게시판의 운영 형태 중 하나)들은 죄다 폭파된 지 예전이고, 그나마 일본 체류시절에 교류한 만화 좀 봤다는 친구들도 이 만화를 이미 놓은 지 오래였습니다. 떡밥은 많은데 제대로 풀지도 않고 유치한 말장난이나 하는, 작화가 좋아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막상 까보니 별거 아닌 작품 중 하나 정도로 말이죠.

 

이런 경향은 같은 스토리작가의 작품인 탐정의식(探偵儀式)이나 리비아썬(リヴァイアサン)도 마찬가지로, 중간에 좀 뭔가 판을 벌이면서 커지다가 폭파로 끝이 납니다. 결국 20년을 기다린 사이코의 엔딩 역시 '스토리 작가가 독자들을 기만했지만 그림작가가 그나마 노력을 해서 수습 같지 않게 수습한 만화' 정도로 남아버렸다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개인의 취향은 개인의 선택이라지만 오오츠카 에이지라는 스토리 작가분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지 마세요."

 

"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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