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는 삶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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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나는 '이야기의 순수함'에 대해서 고민한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인물의 과도한 물욕과 살의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물론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내가 아는 한은, 그렇지 않은 인간이 훨씬 더 많다. 또한 '영화 같다'는 말은 대개 '현실 같지 않다'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영화가 사실이나 현실에서 꼭 많이 벗어나야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그리고 가족과 이웃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굉장히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진심을 다해 접근하는 영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이 영화에는 컴퓨터 그래픽도, 상황과 인물을 설명하는 쓸데없는 대사도, 감정 과잉의 BGM도, 만들어진 안타고니스트도 없다. 바로 <흔적 없는 삶>이라는 2018년산 영화다.

 

흔적없는삶Leave No Trace (2018)

 

 영화는 숲속에 사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언뜻 그들이 캠핑을 하고 있나 싶지만 그들에게는 유명 브랜드의 텐트도, 그럴싸한 여타 장비도 없다. 최소한의 물건으로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숲에서 버섯 따위를 채취해 허기를 면한다. 물론 문명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아주 가끔 마트에 가서 초콜릿이나 쌀, 계란 등 숲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사서 거주지로 돌아온다. 그러나 마트에 가려면 아주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할 때만 간다. 또한 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고 딸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버지는 사회 부적응자이며 딸을 학대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끔직이 위하는 동시에 서로를 의지한다. 보통의 삶을 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사실은 하루, 아니 한 시간 걸러 다투고 끊임없이 구속하며 구속 당하는 사이인 걸 생각해볼 때 두 부녀의 관계는 아주 단단하다. 그들이 언제부터 그런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이 영화는 정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을, 보는 이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그런 생활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약간의 짐작이 가능한데 그것은 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으며 심각한 수준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어둠의 묵시록>과 <젊은 사자들>을 보았는데, 확실히 전쟁이라는 건 문명을 근본적으로 거부할만한 이유가 되는 - 아주 나쁜 의도로 빚어진 - 재앙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영위하고 있건만 사회는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이 거주지를 버리고 문명과 반갑지 않은 만남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숲에 살아선 안되고 주거를 조건으로 돈을 지불한 집에 살아야 하며, 숲에서 음식을 채취해서는 안 되고 노동을 통하여 돈을 벌어야 하며 그 돈으로 세상이 '당신에게 필요하다'고 강요하는 것을 끊임없이 사야만 하고, 아버지와 딸은 '사회통념상'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왜 그래야 하는가? 어째서 멀쩡한 산을 밀어버리고 그 산에 살던 모든 동물을 쫓아내고 식물을 죽인 후에 지어진 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왜 굳이 필요 이상의 돈을 벌어야 하는가? 왜 아버지와 딸이 친밀해서는 안 되는 건가?

 

 공원에서 사는 것이 불법이라며 사회는 그들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노동을 해서 '사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종용하는데 그 일이라는 게 기가 막힌다. 고작 크리스마스 시즌에 잠시 쓰이는 트리를 만들기 위해 길러진 - 전부 똑같은 모양으로 다듬은 - 나무를 수천수만 그루 베어내는 일이다. 그가 법이 허락하는 거처에 머물며 노동을 하며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도 그를 괴롭히는 헬기 소리를 국가가 막아주지는 않는다.

 

 물론 어떤 이들에겐 굉장히 급진적인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 번쯤은 반드시 고민해야만 한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화폐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말이다. 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는 아주 작은 아나키스트가 하나씩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Thomasin McKenzieThomasin McKenzie

 

 Ben Foster, 혹시 자식이 있나 싶어 알아보니 2018년에 결혼을 했고 슬하에 1녀가 있다. 잘해야 한국 나이로 두 살일 터, 딸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연기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의 내재된 연기력이 본바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떤 장면에서 좀 많이 울었다. 그리고 아마 당신도 울게 될 것이다.

 

 Thomasin McKenzie. 아아, 이 배우를 어떤 말로 찬양해야 할지! 과장되지 않지만 누구보다 솔직한 연기를 영화 내내 선보이는데, 세상 모든 연출자들이 자신의 영화에서 어른 입맛에 맞는 여자애들 캐릭터를 틀에 찍어내고 있을 때 이 배우가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그들은 이 배우의 연기를 보고 - '여자아이'가, 그리고 딸이 근본적으로는 어떤 존재였는지 - 업데이트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서 아주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다.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장인물들은 무엇을 보여주는지, 우리의 문명화된 삶에 대안은 있는지, 사회, 공동체는 우리에게 어떤 해악을 미치는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리뷰를 본 당신은 누군가에게 이 영화가 이렇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지나가듯 가볍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이 영화를 꼭 한 번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다. <흔적 없는 삶>은 당신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무너트릴 것이다.

 

 애초에 우리에겐 무언가를 소유할 권리가 없다. 집도, 땅도, 물건도, 그리고 자식도.

 

Copyright ⓒ 조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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